스타들을 빛내는 자리에 빠질 수 없는 그것, 레드카펫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영화 '브로커' /CJ ENM |
최근 한국 영화계에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한국 영화 연출작인 '브로커'가 제75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된 것이다.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배우들은 으레 레드카펫을 밟게 되는데, 칸의 레드카펫을 밟는다는 건 배우들에게는 한번쯤은 상상해 보는 일일 것이다.
영화제에 참석하는 수많은 별들을 빛내 주는 장치 중 단연 으뜸은 레드카펫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의 레드카펫은 전 세계 유수의 시상식이나 영화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행사로 레드카펫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모습은 시상식에 앞서 행사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붉은색은 옛날부터 부의 상징이었다
레드카펫 /flickr |
사람들이 매일 밟고 다니는 카펫은 우리에겐 일상 그 자체라 역사나 유래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본 적이 드물 것이다. 최초의 카펫은 양털, 염소털로 만든 양탄자였다고 하며 중동 어딘가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히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진 몰라도, 초기의 카펫들은 사람들이 땅에 앉기 편하려고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땅이나 바닥은 그냥 앉기엔 춥고 불편했으니 사람들은 바닥과 자신의 엉덩이 사이에 둘 뭔가가 필요했다.
파지리크 카펫 /flickr |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카펫은 파지리크 카펫으로, 남시베리아 고르노알타이 계곡의 파지리크에 스키타이호족의 분묘에서 발견되었다. BC 5세기의 것으로서 여러 가지 출토품 중에 의복, 복장품, 펠트류, 태피스트리, 양탄자가 있다. 이것들은 도굴에 의한 틈새에서 얼어붙었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던 귀중한 것이었다. 그 후 가까운 바샤다르 고분에서 BC 6세기의 양탄자 조각이 나왔는데 파지리크의 카펫은 터키 매듭, 바샤다르의 카펫은 페르시아 매듭이었다.
카펫은 특히 중동에서 많이 발전했으며 카펫 하면 자동으로 터키나 페르시안이 떠오를 정도다. 중동에서 양탄자나 카펫은 개인들이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일종의 직업이 됐다. 가족 구성원들은 비는 시간에 카펫을 만들어 돈을 벌었는데, 카펫은 어떤 물건을 구매하는 돈의 역할도 했다. 사람들이 지참금을 내거나 가축을 구입할 때, 세금을 낼 때에도 돈의 역할로 카펫이 쓰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직접 만든 양탄자가 많은 부를 가진 부유층들을 위한 장식용으로 쓰였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 있는 부조, 왕좌 밑으로 깔려 있는 카펫 /flickr |
르네상스 미술에서는 특히 레드카펫이 자주 등장했는데 동양적인 분위기와 복잡한 무늬가 특징이다. 특히 귀족이나 왕실을 다룬 그림들이 많았는데 붉은색은 귀족이나 왕족을 상징하는 일종의 아이템이었다. 붉은 동양풍 카펫은 그림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카펫은 대개 그림에서 배경 또는 가구에 씌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귀족들은 부유하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붉은색 옷을 입었고 이들의 발밑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다.
꼭 영화제뿐만이 아니어도 공식 행사, 인사들을 환영하기 위한 자리 등에 흔히 쓰이는 레드카펫은 원래 귀빈을 영접할 때 등 외교적 관례에서 대중화되었다고 된다. 이는 귀빈에게 맨땅을 밟지 않게 하겠다는 극진한 환영과 영접의 뜻이 있다. 실제로 영어 표현 중에서도 성대하게 환영하다, 극진히 대접하다를 ‘Roll out the red carpet’이나 ‘Give someone red carpet treatment’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아가멤논이 걸어갔을 레드카펫 /flickr |
레드카펫은 기원전 458년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가 쓴 비극 '아가멤논'에서 유래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르고스의 왕인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10년 만에 귀환하자, 부인 클리템네스트가 신의 길을 상징하는 붉은 카펫을 깔고 그를 맞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가멤논은 붉은색이 신의 색이기 때문에 그 위를 걸을 수 없다고 거부한다.
그러자 클리템네스트는 끊임없이 그를 설득했고, 결국 아가멤논은 레드카펫을 밟고 집으로 들어간다. 클리템네스트는 10년 전 자신의 명성을 위해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쳤던 아가멤논을 기억했고, 미케네의 왕 아이기스토스와 불륜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아가멤논은 그날 클리템네스트에게 살해당했는데, 어쩌면 아가멤논의 눈앞에 펼쳐진 붉은색은 배신과 죽음의 상징이었고 피의 색이기도 했던 셈이다.
원래 서양에서는 염색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염색 없이 그냥 옷을 입었는데, 식물을 이용해 염색을 시도하긴 했지만 빨래를 하면 색이 빠지고 바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이런 와중에 페니키아인들은 염색에 관심이 많았는데, '푸르푸라'라는 우렁이의 내장을 항아리에 넣고 끓이면 자주색 물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푸르푸라'는 지금의 보라색을 뜻하는 영어 '퍼플'의 기원이기도 하다. 그런데 원료를 얻기가 하도 까다로워, 1g의 물감을 얻는 데 무려 1만 개의 우렁이가 필요했다고 전해진다.
사파위 왕조를 묘사한 그림, 붉은색 옷을 입은 귀족들과 붉은색 양탄자가 보인다 /flickr |
이 물감으로 염색한 옷은 엄청나게 비쌌기 때문에 자연히 이 색으로 물들인 옷은 부유층의 상징이 되었다. 이 기법은 그리스와 로마로도 이어졌다가, 자주색을 내는 기법이 사라지게 되면서 사람들은 자주색 대신 붉은색으로 염색을 하기 시작했다. 붉은색은 인류의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인류가 만든 최초의 색 중 하나이다. 이집트인, 마야인들은 얼굴에 붉은 물감을 발라 의식을 치루었고 로마의 장군들은 전투에서 승리를 축하할 때 얼굴과 몸을 붉은색으로 칠했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이 붉은색을 자주색처럼 암컷 연지벌레라는 동물에게 얻었는데, 자주색처럼 만만치 않게 많은 재료가 들어갔다. 10㎏의 옷을 염색하려면 연지벌레 10만 마리가 넘게 필요했다고. 자연히 이 붉은색 옷도 자주색처럼 부자들이나 입는 옷이 됐다. 부유층들은 붉은색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생각해, 서민들은 붉은색이 들어간 옷을 입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 집안 곳곳 식기나 장식품에 붉은색이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다.
당연히 서민들도 사람인데 붉은색 옷을 입고 싶어했을 것이다. 1524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기반으로 한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농민들은 '메밍겐의 12개 조항'을 요구한다. 이 조항들 중에는 '붉은색 망토'를 입게 해 달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모든 평민들이 똑같은 붉은색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은 평등이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결국 이 조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가멤논'에서도 아가멤논이 붉은색이 신의 색이라 걷는 것을 거부했다고 하니 붉은색은 옛날부터 다른 색보다 의미가 남달랐던 건 확실해 보인다. 나폴레옹 1세는 황제 즉위식을 올릴 때 레드카펫을 깔았다고 하며, 1821년 미국의 제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의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레드카펫이 깔렸다고 한다. 이후 레드카펫은 정치적인 고위 인사들이 참여하며, 세간의 주목을 끄는 행사에 거의 표준으로 등장했다.
20세기 리미티드 카펫 재현 /Wikimedia Common |
본격적인 레드카펫은 20세기부터였는데, 1902년 뉴욕센트럴철도가 운영한 급행열차는 이전의 열차들과 비교했을 때 더 빠르고 편리한 교통 수단이었다. 빠른 열차를 이용할 수 있는 건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열차는 들어오는 승객들을 레드카펫으로 맞이했는데, 이 카펫은 승객들이 열차로 편리하게 갈 수 있도록 도왔다. 카펫 자체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이 카펫은 주로 일등석 티켓을 가진 사람들에게 쓰였기 때문에 레드카펫 자체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1920년대 후반까지 레드카펫은 자연스럽게 할리우드와도 연결이 되었는데, 1922년 개봉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연의 무성 영화 '로빈후드'의 초연에 처음으로 진홍색 카펫이 바닥에 깔렸다. 196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시상식 입구에 레드카펫을 깔았는데, 안타깝게도 당시 레드카펫이 찍힌 사진들은 흑백이었고 컬러 사진이나 필름이 보편화되기 전이었다. 시청자들은 1966년 처음 컬러로 방송이 송출되기 전까지 레드카펫의 강렬한 색을 실감하지 못했다.
1988년 8월 28일 열린 에미상 레드카펫을 걷는 배우들 /flickr |
이때부터 레드카펫의 상징성은 아가멤논의 죽음에서 본격적으로 부와 지위의 상징으로 변한다. 레드카펫은 스타들이 영화제에 초대되었을 때 익숙하게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이템 중 하나가 됐다.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의 소넷 스탠필 수석 큐레이터는 BBC컬쳐와의 인터뷰에서 '옛날의 '귀족'이 오늘날의 영화 배우들과 동의어가 되었다는 점에서 레드카펫은 흥미롭다'란 말을 했다. 레드카펫의 황금기는 여성 배우들이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으면서 시작됐고, 기자들과 팬들은 유명 연예인들이 레드카펫을 걷는 것을 보기 위해 모였다.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마릴린 먼로, 오드리 헵번 등의 사람들을 보기 위해 할리우드로 몰렸고, 자연히 레드카펫은 할리우드의 유산이자 스타들을 빛내는 장치가 되었다. 오스카나 그래미 등의 시상식이 인기가 많은 것도, 유명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있지만 이 사람들이 얼마나 잘 꾸미고 와 레드카펫을 걷는지를 보고 싶어하는 것도 있다. 배우들은 미디어, 팬들의 관심을 어떻게든 사로잡아야 하며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매년 엄청난 돈을 투자한다. 레드카펫은 이 유명인들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이자 팬들과 유대감을 느끼는 자리로도 쓰이며,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도 주요한 수단이 됐다.
미국 제45대 트럼프 대통령 앞에 깔린 레드카펫 /flickr |
꼭 영화제가 아니어도 레드카펫은 그래미, 오스카, 멧갈라 등 배우나 가수들이 참여하는 행사에도 쓰인다. 시상식은 건물 안에서 열리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깔린 레드카펫 위에 선 스타들과 기자들, 디자이너들이 한데 몰리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시상식뿐만이 아니어도 지위 높은 사람들이 땅을 직접적으로 걷는 것을 피하도록 카펫을 깔아 놓는다. 대통령이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건물까지 갈 수 있도록 활주로에 깔아 놓거나, 영국 여왕이 그의 차에서 가는 곳 어디든 문까지 이동하는 레드카펫을 깔아 놓기도 한다고.
MTV의 블루 카펫과 환한 표정의 스탭이 함께 /flickr |
레드카펫이 특별한 건, 단순히 배우나 가수들의 사진을 찍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브랜드나 로고의 협찬을 포함하는 홍보 마케팅에도 쓰인다는 것이다. 연예인들은 이 레드카펫 위에서 화려한 옷을 뽐낼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과 많은 인터뷰를 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다만 모든 행사에서 레드카펫을 쓰는것은 아니다. 니켈로디언 키즈 초이스 어워드에서는 주황색 카펫이 쓰이며 MTV에서는 파란색 카펫이 쓰인다고 한다. 2019년, 영화 '명탐정 피카츄'에서는 주인공인 피카츄가 노란색이라 노란 카펫을 사용했고 2020년 영화 '소닉 Sonic the Hedgehog'에서는 소닉을 상징하는 파란색 카펫을 썼다.
레드카펫은 이제 가수나 배우들을 좋아하는 팬들이 그들을 매일 따라다닐 수 없기 때문에, 평소에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들을 가까이 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됐다. 이번 칸 국제영화제에서도 레드카펫은 유명인들이 어떤 디자이너의 옷을 입었는지, 어떤 영화를 찍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성대한 개막을 알릴 것이다.
꼭 유명인들만이 레드카펫에 설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끼리 특별한 사람들을 기념할 때 문 앞까지 레드카펫 하나를 장만하고,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이 그 카펫을 밟고 걷는다면 어느 영화제나 시상식 부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가장 강렬한 색 중 하나인 붉은색의 레드카펫은 지금도 귀빈을 대접하는 의미로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