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6502, 헬로우 6502. 8비트의 원점 6502의 추억.
지난 연말, 한 통의 부고는 많은 8비트 키드들을 추억 여행으로 보내 버리기에 충분했다.
6502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척 페들(Chuck Peddle)의 별세 소식이었다. 그의 이름을 부고 이전에 특별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6502를 만든 이가 노인이 되어 돌아가실 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것에는 마음 한쪽이 허해지는 법이다. 6502라는 네 자리 숫자는 좋았던 시절로의 감성 여행을 위한 비밀번호와도 같은 것인가 보다. 6502라고 하면 우리에게도 익숙한 애플(물론 우리의 청계천 유통버전은 파인애플 처럼 저작권·상표권 무시로 창의적이었지만)은 물론 아타리 2600, 코모도어 VIC-20 등, 그리고 닌텐도 패미콤(NES)에 이르기까지 8비트의 상징과도 같은 CPU였다.
애플에 쓰였기에 가끔 6502가 그 이후 애플 컴퓨터에 쓰인 CPU, 예컨대 68000처럼 모토로라 제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제작사는 MOS라는 엄연히 다른 회사다. 돌아가신 척 페들이 모토로라부터 사실상 팽당해 팀째로 뛰쳐나와 울분에 만든 CPU였다. 그러나 그 원류는 역시 모토로라에 있었다. (그리고 결국 모토로라와의 소송 끝에 사운은 시들어버리고 만다.)
모토로라 MC6800의 변태적 ‘마개조(魔改造)’판이라 부를만한데, 무엇보다 그 극단적인 단순함으로 유명했다. 단순화의 목적은 가격에 있었다. 당시 인텔의 8080이 149달러쯤 했는데, 6502는 25달러였다. 당시 미국 경제가 인플레 대잔치 중이었기에 정확히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4인 가족의 한 끼 외식 정도가 25달러 정도였다고 하니, 지금 우리 돈 감각으로는 10만 원 정도의 느낌이었을 것 같다. 어쨌거나 다른 회사들의 제품에 비하면 월등히 싼 가격이었다. 6502는 가격 경쟁을 촉발했고, 다른 제품들이 아무리 내려도 점점 더 싸지는 마법을 부리기도 했다.
당시 경쟁제품인 Z80의 트랜지스터는 8,500개였던 점에 반해 6502는 3,500여 개였으니 그 탁월한 가격경쟁력의 원천은 이해하기 쉽다. 이 단순함의 미학은 엄연히 CISC이면서도 RISC적인 활용법에서 두드려졌다. 6502는 하나의 일 처리를 하기 위해 여러 명령을 수행해야 했지만, 이 여러 명령을 하나의 클럭 사이클에 수행했다. "오, 이렇게도 되는구나!"라는 발상의 전환은 지금 우리 모두가 의존하고 있는 또 하나의 혁신으로 이어졌다.
여러분의 스마트폰을 구동하고 있는 명령 체계 ARM. 이 ARM은 Advanced RISC Machine의 줄임말로 알려지곤 했지만, 원래는 Acorn RISC Machine을 뜻하는 말이었다.
에이콘. 대영제국 8비트 문화의 상징 BBC 마이크로를 1981년에 출시한 회사다. BBC 마이크로 자체도 6502였지만, 에이콘 자신들이 누구보다도 6502의 애호가였다. 1974년에 첫 등장한 6502를 1979년의 에이콘 시스템 1부터 1983년의 시스템5에 이르기까지 줄곧 애용하며, 그러니까 사골처럼 우려먹으면서 둘도 없는 6502 전문가로 거듭난다. 하지만 무엇이든 파면 팔수록 알면 알수록 그 한계 역시 너무나 잘 느끼게 되는 법이다.
ARM의 어머니로 알려진 소피 윌슨은 에이콘의 직원이었던 83년, 8비트의 한계를 뛰어넘는 CPU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한다. ARM 잉태의 순간이다. 6502와 ARM의 유사성이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6502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6502의 단순함과 효율성도 자극을 줬겠지만, 6502 제조사 MOS에 방문했을 때의 충격이 컸다. 6502의 다음 버전 준비를 사실상 한 사람이 다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용기를 주는 풍경이었다.
이처럼 6502가 있었기에 ARM이 있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만큼 에이콘(Acorn)에게 6502는 늘 훌륭한 놀이터이자 원점이었다. 6502 제조사 MOS도 에이콘도 워낙 구멍가게였지만 혼자서도 가능한 일의 한계는 이처럼 무궁무진하다. 2년 뒤인 1985년 최초의 ARM, 그러니까 Acorn RISC Machine 프로세서는 등장하고 드디어 스마트 혁명의 역사가 시작된다.
작년 말 6502를 둘러싼 흥미로운 논문이 하나 게재되었다. 6502로 만든 빈티지 장비로 핵무기 해체 검사 장비를 만들자는 것. 방사능 측정으로 핵무기가 안전하게 해체되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첨단 장비의 화면에 OK가 뜬다고 한들 그것이 적국의 검사 장비라면 어느 나라가 믿겠느냐는 것. 하지만 세계인 모두가 속속들이 알 수 있는 6502로 장비를 만들고 그 설계를 공개하면 모두가 이것은 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추억의 6502는 아직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