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거란 전쟁’, 아빠들만의 ‘또본드’?…MZ도 사로잡은 정통 사극 [이슈크래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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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아빠가 사극 볼 때마다 다른 방송 못 봐서 싫었는데, 아빠만 재밌는 거 보고 있었네!”
KBS2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인기를 끌면서 나오는 말입니다. 연일 긴박감 넘치는 전개로 중장년층은 물론 MZ세대까지 사로잡으며 넷플릭스까지 점령한 ‘고려 거란 전쟁’.
3일 방송된 ‘고려 거란 전쟁’ 8회에서는 거란군이 곽주성과 영주성까지 함락시키면서 고려가 위기에 빠지는 모습이 그려졌는데요. 조정의 관리들로부터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친조(한 나라 군주가 상국 조회에 참석해 신하임을 인정하는 것)를 청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현종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여기에 강감찬까지 직접 친조를 청하는 표문을 짓겠다고 나서자, 믿었던 신하에 대한 배신감을 감출 수 없었죠.
그러나 강감찬의 속내는 전혀 달랐습니다. 백성을 위해 거짓 친조를 보내자고 제안한 겁니다. 현종과 단둘이 남게 된 강감찬은 “적을 속여 시간을 벌고 그사이에 반격을 준비하자는 말”이라며 자신이 직접 표문을 지어 거란의 진중으로 가겠다고 밝혀 현종의 놀라움을 자아냈죠.
방송 말미에는 백기를 든 별장과 함께 거란으로 향하는 강감찬이 “소신은 미치도록 승리하고 싶사옵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고 싶사옵니다”라며 결의를 다지는 엔딩이 그려져 시청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습니다. 이 강렬한 장면에 심장을 부여잡은 게 정통 사극의 주된 팬층, ‘아빠들’뿐만은 아니었습니다. 1020 세대도 온라인상에 극찬을 쏟아냈는데요. “도파민 폭발”, “강감찬은 승리 광인이었네”, “10분 만에 드라마 끝나길래 당황했는데 45분 지나 있었다” 등 호평이 이어졌습니다.
정통 사극이 기성세대는 물론 젊은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건 이례적인 일인데요. ‘고려 거란 전쟁’의 인기 비결에 대해 분석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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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부터 남다른 정통 사극…‘외면’ 받던 시기도 있어
‘고려 거란 전쟁’은 관용의 리더십으로 고려를 하나로 모아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려의 황제 현종, 그의 정치 스승이자 고려군 총사령관이었던 강감찬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방송 전부터 “KBS가 말아주는 정통 사극에 최수종이 주연? 일단 보자”는 반응이 속출했죠.
실제로 KBS는 정통 사극의 ‘명가’로 꼽힙니다. 1980년대부터 정통 사극을 꾸준히 제작하면서 ‘대하드라마’ 시리즈를 만들었죠. 1981년 1월 5일 방송된 ‘대명’을 기점으로 대하드라마가 공개돼왔습니다. ‘용의 눈물’(1996), ‘태조 왕건’(2000), ‘불멸의 이순신’(2004), ‘대조영’(2006) 등 제목부터 굵직한 작품들은 시청률 30%를 가뿐히 넘기면서, KBS가 정통 사극으로 전성기를 누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방송 플랫폼이 늘어나고 장르도 다양해지면서 정통 사극에 대한 관심은 과거 같지 않았는데요. 짧고 가벼운 걸 원하는 트렌드로 접어들면서, 긴 호흡의 대하드라마도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게 된 겁니다.
제작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정통 사극은 다른 장르보다 제작비가 많이 들지만, 간접광고(PPL)를 받긴 어려워 수익을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증’이라는 문제도 있습니다. 자국 역사를 지나치게 미화한다는, 이른바 과한 ‘국뽕’ 논란을 빚거나 시대적 배경과는 영 거리가 먼 고증으로 ‘역사 왜곡’ 논란에도 휩싸일 수 있죠. 일례로 조선 태종 때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SBS ‘조선구마사’ 중국식 소품이 등장하면서 역사왜곡 논란을 빚은 바 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 중 일환인 ‘문화공정’이 아니냐는 비판까지 쇄도하면서 2회 만에 조기 종영하는 굴욕을 맛봤죠.
이에 퓨전 사극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철저한 고증보다는 상상력에 기반해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건데요. 현재 MBC ‘열녀박씨 계약결혼뎐’, ENA ‘낮에 뜨는 달’ 등이 방송 중입니다. MBC ‘연인’은 최고 시청률 12.9%를 기록, 드라마·OTT 통합 화제성 1위, 드라마·비드라마 전체 프로그램 화제성 1위를 차지(굿데이터코퍼레이션)하면서 지난달 인기리에 종영했습니다. 대중의 호응이 높아지자 방송 1회분을 연장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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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고려 거란 전쟁’으로 대하드라마 부활 예고
‘고려 거란 전쟁’은 KBS가 공영방송 50주년을 맞아 수신료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대하 사극의 부활을 내걸고 특별기획한 작품입니다. 제작비 총 270억 원가량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편당 기준으로 대하드라마 중에서는 최대 규모입니다.
김덕재 KBS 부사장이 직접 각오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김 부사장은 지난달 9일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고려 거란 전쟁’은 공영방송 출범 50주년 대미를 장식하는 뜻깊은 드라마”라며 “지난 1년간 KBS가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대하 사극을 향한 국민의 열망에 보답하고자 열심히 준비했다. 기존의 대하 사극보다도 더 많은 제작비를 투입하고 명품 배우들을 모셔 왔다. 대하 사극은 어려웠던 시대를 조상들이 어떻게 헤쳐 나가고 성장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당시 시대 상황과 조상들의 활약을 보고 현재의 우리도 처해있는 상황에서 모티브를 찾아 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했다”고 설명했죠.
기획에서부터 공을 들였습니다. 연출을 맡은 전우성 감독은 고려사에 정통한 학자들에게 의견을 받고 이정우 작가와 함께 대본 집필에 들어갔는데요. 공동 연출자인 김한솔 감독은 “저희가 정말 고민을 많이 했고 파격적인 촬영을 했다”며 “KBS 드라마 센터 한 부지를 철거하고 엄청 큰 대형 크로마 세트장을 지었다. 귀주대첩 장면은 99%를 거기서 다 찍었다. 한국 사극 역사상 최초일 것”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는 “그 뒤는 또 우리 내부의 역량과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CG 업체가 참여해서 채워줬다. 앞에 있는 전쟁 의상이나 사물들을 채워주셔서 적절히 배합해서 촬영했다”며 “‘대하’라는 말에 걸맞은 게 귀주대첩, 흥화진 전투다. 귀주대첩의 경우 대회전이다. 각국의 20만 명, 10만 명이 모여서 싸운 거다. 대한민국의 3대 대첩인데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이번에 기술력이 뒷받침돼서 해냈다. 지금까지 (다른 드라마) CG 비용의 몇 배를 사용했다”고 부연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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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부터 연출·연기까지 잡았다…넷플릭스 1위의 비결
‘고려 거란 전쟁’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한 고증입니다. 의복부터 공을 들였는데요. 제작진에 따르면 적국 거란의 복식 고증을 위해 몽골 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를 찾아 자문받았다고 합니다. 전우성 감독은 제작발표회에서 “보통 거란이라고 하면 털가죽 입고 도끼를 휘두르는 야만적인 국가라고 생각하시는데, 거란군은 송나라의 규격화된 갑옷을 착용했다. 내부적으로는 거란군이 고려군과 차별화가 안 된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실제 고증에 맞춰 군복을 입혔다”고 설명했죠.
단 3000명의 고려군이 40만 명의 거란군을 물리친 흥화진 전투는 실제 산성에서 촬영했고, 불화살을 쏟아낸 공성전까지 과거 모습 그대로를 재현했습니다. 귀주대첩은 러닝타임만 30분에 달하는데, 여기엔 역대 최대의 제작비를 들였죠. 첨단 VFX 기술까지 도입해 사실적인 장면을 구현했습니다.
무기도 직접 제작했습니다. 실제 제작한 국궁으로 국궁식 사법으로 활을 쐈는데, 이는 훈련기간도 길고 뿔깍지라는 별도 도구까지 필요해 그간 사극에서 고증이 잘되지 않았습니다. 세부적인 연출도 최대한 실제 기록에 따라 고증한 거죠.
전개도 군더더기 없어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방대한 역사적 사건을 담아내는 대하드라마는 100회는 기본이고, ‘태조 왕건’처럼 200회로 구성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 거란 전쟁’은 총 32부작인데요. 불과 5회 만에 왕이 죽고 새 왕이 즉위하며 전쟁이 발발하죠. 속도감 있는 전개로 생동감을 더하는 겁니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점은 배우들의 맹활약입니다. ‘고종, 순종, 그리고 최수종’이라는 말이 있듯 많은 사극에서 왕 역할을 섭렵한 최수종이 이번엔 귀주대첩으로 고려를 지켜낸 명장 강감찬 장군으로 분했는데요. 이로써 최수종은 고려 초기와 전기를 아우르는 배우가 됐죠. 특히 8회 말미 백기를 든 별장과 함께 거란으로 향하면서 승리에 대한 결의를 다지는 모습은 묵직한 울림을 선사합니다.
지승현은 고려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 장군으로 분하면서 “연말에 큰 상 하나 받겠다”는 심상치 않은 반응을 자아내고 있는데요. 극 중 거란군이 공성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고려 백성 포로들을 방패 삼아 흥화진 성벽을 오르는 가운데, 양규가 그 방향을 향해 피 묻은 손으로 눈물을 흘리며 “쏴라”라고 말하며 활시위를 당기는 엔딩은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김한솔 감독은 제작발표회에서 “전쟁 담당으로서 말씀드리지만, 최수종 장군님 보러 왔다가 지승현 장군님 주워갈 것”이라며 “강감찬 장군님만 알고 있다가 양규 장군님의 활약을 보고 편집하다가 네 번 울었다. 편집 감독님이 주책 떨지 말라고 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양규 장군은 소수의 전력으로 수천 명의 거란군이 점령한 곽주성을 탈환한 전력도 있습니다. 소규모의 기동대로 꾸준히 거란군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포로들을 구해내기까지 했는데요. 시청자들이 향후 그려질 이야기에 대해 “벌써 떨린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는 이유죠.
하루아침에 왕이 됐지만, 점차 현명한 군주로 거듭나는 현종 역의 김동준, 목종을 폐위시켰지만, 단순히 반역자라고 볼 수 없는 강조 역의 이원종도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줬고, 목종 역의 백성현, 천추태후로 분한 이민영 등도 호연으로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OTT 랭킹에서도 ‘고려 거란 전쟁’의 저력은 빛났습니다. KBS 대하 사극으로는 처음으로 넷플릭스에서 동시 공개하면서 넷플릭스 한국 일간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했고, OTT 통합검색 및 추천 플랫폼 키노라이츠 선정 11월 4주 차콘텐츠 랭킹에서도 1위에 올랐습니다. 사극의 주 향유층이었던 기성세대는 물론 젊은 세대까지 유입됐다는 걸 방증하는 셈이죠.
‘고려 거란 전쟁’은 퓨전 사극의 홍수 속 정통 사극의 매력을 자랑하고 있는데요. 정통 사극이 아빠들만의 전유물이라는 건 이제 옛말인 듯합니다.
[이투데이/장유진 기자 ( yxxj@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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