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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동아일보

터너를 이긴 푸들

동아일보

에드윈 랜지어 ‘법의 입안’, 1840년.

한 무리의 견공이 책상이 있는 실내에 모여 있다. 붉은색 안락의자에 앉은 하얀 푸들은 다양한 종류의 개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앞에 펼쳐진 책 위에 한 발을 올려놓은 채 먼 데를 바라보는 푸들의 눈빛은 마치 깊은 상념에 빠진 사람을 연상케 한다.


이 그림을 그린 에드윈 랜지어는 열세 살 때 영국 왕립아카데미에 전시를 할 정도로 미술신동이었다. 24세에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고 5년 후 그곳 교수가 됐다. 24세에 준회원을 거쳐 32세에 교수가 된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보다 이른 성공이었다. 그런데 이 동물화는 풍경화가로서 당시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터너에게 치욕을 안겨줬다. 1840년 왕립아카데미 전시회에는 1200점이 넘는 작품들이 출품됐지만 당시 65세 거장 터너와 38세의 젊은 화가 랜지어의 그림에 이목이 쏠렸다. 그림을 본 평론가들의 반응은 180도로 엇갈렸다. 터너의 출품작 넉 점에는 ‘노예선’도 포함됐는데,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돈 때문에 배에서 내던져지는 노예들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불편한 주제에다 형태도 뚜렷하지 않게 그린 터너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그를 정신이상자나 망령 든 화가라고 비난했다. 반면 랜지어의 그림에는 ‘개의 표정을 잘 드러낸 걸작’이자 그림의 기술, 아이디어, 색채, 구성, 세부 묘사 등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찬사를 보냈다. 특히 강아지를 무척 좋아했던 빅토리아 여왕에게는 완전히 ‘취향 취격’의 그림이었다. 랜지어는 곧 여왕이 가장 총애하는 화가가 됐고, 10년 뒤엔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사실 이 그림은 순수한 동물 초상화가 아니다. 영국 법조계에 대한 풍자화다. 붉은 의자에 앉은 푸들은 당시 대법관이었던 헨리 브로엄을 상징한다. 그는 노예폐지법과 선거법 개정 등을 주도한 진보적 정치가였지만 늘 반대파 동료들과 싸워야 했다. 화가는 의인화를 통해 법안 하나를 통과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일인지를 은유적으로 위트 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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