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임박 알려야 하나 감춰야 하나, 그것이 문제로다”
이민 2세 정체성 다룬 영화 ‘페어웰’
시한부 할머니에 사실 숨기는 가족, 중국계 미국인 손녀의 혼란과 고민
빌리 왕 감독 현실감 있게 그려… 한국계 주연 아콰피나 호연
영화 ‘페어웰’에서 주인공 ‘빌리’(오른쪽)가 폐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친할머니의 어깨에 기댄 모습. AUD 제공 |
“동양에서 개인의 삶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다. 가족의 것이고 사회의 것이지.”
다음 달 4일 개봉하는 영화 ‘페어웰’에서 주인공 ‘빌리’(아콰피나·본명 노라 럼)에게 큰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빌리는 러닝타임 내내 동양의 가족중심적 사고방식에 저항한다. 어렸을 적 부모님과 함께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중국계 이민자 빌리는 폐암 4기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친할머니에게 가족들이 이를 알리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죽는다는 사실을 본인이 모르게 하는 게 가족의 역할”이라는 큰아버지의 말에 빌리는 “할머니도 자신의 상태를 알고 죽음을 준비할 권리가 있다”며 항변한다.
‘개인의 죽음에 대한 알 권리를 타인이 막을 자격이 있는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이 과연 ‘착한 거짓말’인가’ 등의 질문과 마주한 빌리는 부모에게 대들기도 하고, 때로는 홀로 눈물을 삼키기도 한다. ‘중국은 원래 그렇다’는 말에 혼란스러워하는 빌리의 모습은 세계 곳곳에서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민자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본인에게 시한부 사실을 숨기는 건 미국에서 불법”이라며 강력하게 저항하던 빌리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이들을 이해하게 된다.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할머니를 위하는 마음만은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다. 결정적인 순간 착한 거짓말에 동참하는 빌리는 자신 안에 내재돼 있던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계기가 된다.
영화는 어찌 보면 뻔할 수 있는 ‘이민 2세의 뿌리 찾기’라는 소재를 ‘진솔함’으로 뛰어넘었다. 빌리 왕 감독은 중국계 미국인으로 이민 2세가 마주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세밀하게 그렸다. “미국이 좋냐, 중국이 좋냐”는 단편적 질문을 받았을 때의 불편함, 중국인과 대화를 할 때 “중국어가 서툴러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느끼는 부끄러움 등 빌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정체성 혼란의 순간은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나오지 못했을 연출이다. 빌리 역의 아콰피나 역시 중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 배우로 이민 2세가 느끼는 가치관의 혼란을 현실감 있게 그렸다. 그는 이 작품으로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영화 부문에서 아시아계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