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필 가옥-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전형필 가옥이 있다. 오래된 한옥으로, 정문에는 ‘간송옛집’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마당에 들어서면 누마루가 있는 본채 건물이 보인다. 댓돌과 주련도 갖춘 제법 규모가 있는 가옥이다. 누마루에는 ‘옥정연재玉井硏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우물에서 퍼 올린 구슬 같은 맑은 물로 먹을 갈아서 글씨를 쓰는 집’이라는 뜻이다.
가옥 안에는 단원 김홍도의 ‘낭원투도’, 겸재의 ‘화훼영모도 병풍 7폭’, 단원 김홍도의 ‘황묘농접’과 심사정의 견본 그림이 걸려 있다. 본채 뒤에는 뒤뜰로 나가는 쪽문이 있고 봄이면 담장으로 온갖 화초가 피어나는 화계가 자리한다. 이 한옥이 바로 국가등록문화재 제521호인 방학동 전형필 가옥이다. 가옥 뒤편에는 묘가 있다. 바로 간송 전형필과 그의 양부 전명기 묘다.
이 가옥은 전형필의 양부 전명기가 인근 농장과 경기 북부, 황해도에서 오는 소출을 관리하기 위해 1890~1900년대에 건립했다. 한국 전쟁 때 훼손되었지만 전형필 사후 종로4가에 있던 본가가 철거되면서 나온 자재로 수리했다. 이후 전명기와 전형필의 제사 때 재실로 사용했다. 2013~2015년에 간송미술문화재단과 도봉구가 본채와 부속 건물, 주변 담장을 보수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ㄱ’자형 구조다. 전형필의 자취가 남아 있는 장소로 역사적 보존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100여 년이 넘은 전통 한옥으로서 건축학적 가치도 크다.
간송 전형필은 우리에게 간송미술관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90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전계훈은 당시 종로4가 상권은 물론이고 왕십리, 답십리, 송파 등과 황해도 연안, 충남 공주, 서산 등에 대농장을 보유한 그야말로 대부호였다. 전형필이 어릴때 양아버지 전명기가 사망하고 형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929년 친부 전영기마저 세상을 떠나자 전형필은 집안의 유일한 상속자가 된다. 당시 그가 물려받은 재산이 지금 가치로 1조 원이 넘는 거금이었가 한다. 전형필은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한다. 그가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문화재에 애착을 갖고 문화재 수집과 국외 반출을 막기 위해 노력하게 된 계기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전형필은 스승인 고희동의 소개로 위창 오세창을 만난다. 오세창은 그에게 ‘간송澗松’이란 호를 지어 준 인물이다. 간송은 ‘산골짜기 흐르는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를 뜻한다. 이후 간송은 한림서림을 인수한다. 그리고 1934년에 성북동에 ‘북단장’을 매입하고 터를 닦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보화각을 연다. 간송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중에도 소중한 문화재들을 지켜 낸 뒤 1962년 세상을 떠났다. 보화각은 유족들과 지인들에 의해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으로 개편되었다.
간송의 문화재 수집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유명한 일화는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훈민정음 창제 원리를 밝혀내는 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한 이 문화재는 간송이 당시 1000원이라는 매매가의 11배, 즉 1만1000원을 주고 구입했다. 문화재의 가치는 제대로 값을 치르는 게 중요하다는 간송의 신념 때문이다. 또 국보 제65호 ‘청자기린형향로’, 국보 제66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국보 제270호 ‘청자원형연적’ 등 자기 구입 과정도 한 편의 드라마다.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가 있다. 일본에 머물며 고려청자의 수려한 멋에 매료된 그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신의 수장고를 채웠다. 그러다 1937년 수장고 처분을 선언했다. 도쿄로 달려간 간송은 그에게 기와집 400채, 요즘 시세로 약 1200억 원을 지급하고 국보급 고려청자를 구입해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냈다.
우리나라에서 진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솔선수범한 간송. 그는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돈은 어떻게 쓰는 것이 바른지 보여 준 민족의 선각자다.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