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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장례식장에서 한꺼번에 죽은 그들을 위해 한 솥 끓였다

[아무튼, 주말]

‘아수라'와 육개장의 미학


“이 육개장 말이야, 수원 광교 쪽 한 군데에서 경기도 전체에 납품을 하는데 맛이 아주 별미야. 내가 이거 먹으려고 문상하러 다닌다고 하면 믿겠니? 다 이거 한 술 뜨자고 사람이 사는 거야.”


박성배 시장(황정민)의 육개장 찬미에 내 눈이 휘둥그래졌다. 수원 광교에 육개장 공장이 있다고? 하필 고향이 수원인지라 대사가 귀에 쏙쏙 꽂혔다. 광교라면 어린 시절 놀러 가 민물새우를 잡고 놀던 동네이다. 취사가 가능했던 시절, 잡은 새우를 라면에 넣고 끓여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자잘한 새우의 몸통을 씹으면 터져 나오는 국물이 시원했다. 그런 광교에….


진짜로 육개장 공장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혹시나 싶어 열심히 검색해 보았지만 실제 공장에 대한 정보는 없다. 시장님의 대사와 더불어 상갓집 육개장의 의미를 곱씹는 이야기만 나온다. 왠지 너무 현실 같지만 ‘아수라’는 분명히 픽션이니 육개장 공장이 있을 거라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그랬다가는 영화의 어둡고도 질척한, 블랙홀 같은 현실에 빨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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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계 형사 한도경(정우성)은 암 환자인 아내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비리를 저지르는 안남시장 박성배(황정민)의 뒷일을 처리해 준다. 독종 검사 김차인(곽도원)이 박성배의 비리와 범죄를 캐기 위해 압박하자, 부담을 느낀 한도경은 자신을 따르는 후배 형사 문선모(주지훈)을 박성배에게 보낸다. 등장 인물들은 살아 남기 위해 서로 물고 뜯는 아수라장에 빠진다./CJ엔터테인먼트·조선일보DB

상갓집 육개장이라. 오랜 외국 생활 끝에 인간 관계가 대부분 끊긴 가운데, 가뭄에 콩 나듯 문상 갈 일은 생긴다. 넥타이를 빌어 매고 봉투를 받아 부조금을 넣고 절을 한 뒤 그대로 장례식장을 빠져 나온다. 앉아서 음식을 먹는 경우는 거의 없고, 설사 있더라도 육개장은 먹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낀달까?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거의 본능적으로 나의 살아 있음을 사무치게 자각하게 돼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음식을 앞에 놓고 앉아 있기가 싫어진다. 상갓집에서 무엇보다 존재감이 뚜렷한 삶의 방증인 음식과 식사를 통해 살아 있음을 느끼기가 영 면구스럽다. 특히 육개장은 일회용 스티로폼 그릇에 얼룩이 남으니 더 마뜩찮다. 벌겋게 점점이 배어 지워지지 않을 얼룩은 삶의 상처, 결국 다른 쓰레기에 섞여 버려지는 그릇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삶의 번잡함과 비애 같다. 그렇다, 음식평론가는 상갓집 육개장을 놓고 직업병처럼 이런 생각을 한다.


왜 하필 육개장일까 싶기도 하다. 풍습이 문제라는 게 아니라, 육개장은 개념과 적용 사이의 괴리가 꽤 큰 음식이기 때문이다. 얼큰함을 책임지는 고춧가루는 볶느냐 안 볶느냐에 따라 맛은 물론 음식의 상태를 크게 좌우한다. 매운맛을 책임지는 캡사이신을 비롯한 고춧가루의 향 화합물은 지용성이다. 따라서 조리 초기에 기름과 함께 볶으면 얼큰함은 물론, 단맛이나 향까지 확 피어올라 육개장의 맛이 한결 더 풍성해진다. 짬뽕 맛집의 제 일 조건으로 한 그릇씩 볶아 끓이는지의 여부를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고춧가루의 맛과 향을 잔뜩 품은 기름은 부글부글 끓어 대류를 일으키는 국물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알갱이로 부스러져 수분 속에 골고루 분배된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유화 현상으로, 맛이 골고루 퍼지는 것은 물론 국물의 감촉도 한결 더 매끈해진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계란 노른자와 기름을 유화시킨 마요네즈가 걸쭉해지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문제는 장례식장 등을 위한 대량 조리에서 이런 조리를 적용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이다. 몇 백, 몇 천 인분이라면 맛보다 효율과 생산성이 중요할 뿐더러 직접 조리하는 솥의 크기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고춧가루를 포함한 모든 재료를 한꺼번에 넣고 가열하는 수준에서 조리가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군 복무 시절 이런 딜레마를 실제로 겪기도 했다.


나는 육군 기계화사단 보급수송대대에서 1종 계원으로 식재료 전체를 관리하면서 대량 조리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지금은 솥을 통째로 넣을 수 있는 가스식 취사기가 보급됐다는데, 이십여 년 전에는 보일러가 핵심인 일체형 조리기기를 썼다. 증기로 쌀을 찌는 한편, 옆에 달린 국솥에 모든 재료를 한꺼번에 넣어 밥과 국을 한 번에 대량 조리한다.


맑은국류라면 이렇게 끓여도 크게 상관 없지만 아무래도 육개장은 썩 맛있지 않다. 그런 가운데 음식에 관심이 많은 사단장이 새로 취임하면서 전체의 보급을 맡은 나의 소속 부대에 계속 자잘한 지시가 내려왔다. 대량 조리에서도 맛을 개선할 조리법을 시험 도입해보라는 게 골자였는데, 핵심이 육개장이었다. 밖에 걸어 놓은 대형 솥에 고춧가루를 볶은 뒤 끓여내고 결과를 보고하라는 것. 원래 솜씨가 좋았던 취사병들이 제대로 끓여내니 육개장은 당연히 맛있어졌다. 다만 200명이 채 안 되는 규모의 대대에서도 간신히 실행에 옮겼던 지라, 일선 전투부대에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육개장의 핵심 재료인 양지머리도 시각을 달리해 볼 필요가 있다. 소 가슴에 붙은 살인 양지머리는 아주 긴 근섬유조직으로 이루어진 큰 덩어리이다. 워낙 조직이 길다 보니 국물을 내고 나면 결을 따라 쪽쪽 찢는 게 이치일 것 같은데 그럼 굉장히 질겨진다. 육개장 뿐만 아니라 양지머리로 끓이는 모든 국의 고기를 이렇게 다루는데, 근섬유조직을 수직 방향으로 최대한 짧게 끊어줘야 부드러워진다. 장례식장 육개장이야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집에서 직접 끓인다면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 국물을 다 낸 양지머리를 건져 완전히 식힌 다음 고기결의 수직 방향으로 얇게 저민다. 씹기도 편해 양지머리의 진한 맛을 한결 더 즐길 수 있다.


아수라는 인도 신화에서 전쟁을 일삼는 못된 귀신이다. 아수라들이 사는 아수라도에서는 늘 싸움이 끊이지 않아서, ‘아수라장’은 끊임없이 분란과 싸움이 일어나 난장판이 된 곳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인다. 바로 박시장과 한도경 형사(정우성)이 육개장을 먹은 장례식장의 꼴이다. 기세 등등했던 대한민국 검사(곽도원)도 박 시장도 한 형사도 모두 죽었다. 장례식장에서 참혹한 살육이 벌어지는 전개도 참으로 놀랍지만, 그보다 이들을 위한 육개장은 과연 누가 먹어줄지 너무 궁금했다.


평소에 상갓집에서 식사를 웬만하면 하지 않는데 이처럼 한꺼번에 죽어버린 이들을 위해서라면 왠지 나라도 육개장을 한 술 떠 줘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육개장을 한 솥 끓였다. 정석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겨울에는 육개장에 봄동을 듬뿍 넣는다. 푹 끓이면 흐물흐물해진 흰 밑동 쪽의 단맛이, 대파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기가 막히다. 먹고 난 대접은 얼룩이 남지 않도록 바로 깨끗이 설거지한다.


[이용재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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