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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조선일보

패션은 판타지로… 영화는 호러로

현실에 지친 청춘들… '극상의 아름다움'과 '극도의 공포스러움'에 흠뻑 빠져들어


요즘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공통으로 읽히는 키워드는 도피(逃避)다. 지진과 테러, 불신과 저성장 등 잿빛으로 우울한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극단이라 흥미롭다. 패션계는 강력한 환상을 무대에 올렸다. 색채부터 소재까지 화려하고도 몽환적인 아름다움으로 무장했다. 영화는 핏빛 공포를 내세운다. 손에 땀을 쥐고 비명 지르며 잠시라도 현실을 잊겠다는 일종의 놀이다.

환상으로 도피

"트럼프 시대를 상징하는 '화염과 분노'에 맞서는 패션계의 결단은 바로 인간이 누릴 '기쁨'을 극대화해 보여주는 것이다."
패션은 판타지로… 영화는 호러로

최근 뉴욕에서 선보인‘마크 제이콥스 2019 봄여름’컬렉션에선‘핑크빛 미래’를 갈구하듯 극도로 장식적인 의상으로 화제를 모았다. /마크 제이콥스

워싱턴포스트의 진단처럼 세계 패션계는 요즘 꿈의 유토피아를 짓느라 한창이다. 경제적 불황과 정치적 불안으로 적신호 가득한 현실에서 도피하는 '이스케이피즘(escapism)'이 최근 펼쳐진 '2019 봄여름' 런웨이를 흠뻑 물들였다.


생로랑은 에펠탑 앞 트로카데로 분수를 인조 야자수가 펼쳐진 미래적 해변으로 바꿔놓았고, 파리에서 쇼를 선보인 톰 브라운은 어린 시절 해변에서 반가이 맞았던 게, 갈매기, 아이스크림 같은 것으로 모델을 형상화했다. 1966년 등장한 마마스 앤드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림'이 배경음악으로 흐르고, 현장에 모인 이들은 '이런 잿빛 하늘에 나는 산책을 하고 캘리포니아를 꿈꿔요' 같은 가사를 따라 불렀다. 뉴욕의 마크 제이콥스는 아일랜드 예술가 지니브 피기스에게 영감을 받아 마치 살아 있는 정원을 만들려는 듯 보였다. 모델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꽃이 됐다. 끌로에나 로에베 등도 풍요로운 휴양지로 관객을 이끌었다. 쇼장 안에서만큼은 세상의 어지러움과 완벽히 차단된 듯싶었다. 그날 아침 전 세계 헤드라인을 장식한 살벌하고 우중충한 뉴스들은 애써 외면했다. 마치 전쟁터 속 방공호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패션은 판타지로… 영화는 호러로

파리 에펠탑 앞에서 펼쳐진‘생로랑 2019 봄여름’패션쇼에서 모델이 물 위를 걷고 있다. /생로랑

패션은 판타지로… 영화는 호러로

신화 속 바벨탑 모습을 형상화한 릭 오웬스의 2019 봄여름 작품. 오른쪽 사진은 23일 헤라서울패션위크 베스트 디자이너로 선정된 한현민의‘뮌’. /릭 오웬스·헤라서울패션위크

아예 신화 속을 파고들기도 한다. 릭 오웬스는 파리 팔레 드 도쿄 미술관 정원에 신화 속에서 무너진 바벨탑과 20세기 러시아 건축가 블라디미르 타틀린이 결국 완성하지 못했던 '제3세계'로 가는 탑을 형상화했다. 최근 막 내린 2019 서울패션위크 카루소 쇼에서도 '금오신화'에서 영감을 받아 시대적 한계에 절망한 이들이 남긴 이야기를 의상으로 풀었다.


지난해만 해도 패션계는 앞다퉈 '#me too(나도 당했다)'와 '페미니즘' 같은 명시적 메시지를 의상에 담았다. 하지만 올 들어 마치 영화 '인셉션'처럼 깨어나도 여전히 꿈속인 듯 몽환적인 분위기다. 해외 전문가들은 이를 '현실도피주의'라 해석하면서도,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극도의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패션계에선 이를 '도파민 드레싱(쾌락적 옷 입기)'이라고 부른다. 정신적 구출이 필요한 시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예술적 위로의 도구를 찾는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학자 캐시 페이스에 따르면 전쟁의 참화 속에서 패션·뷰티 산업이 발달했다. 1차 대전 직후 샤넬의 바지와 슈트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2차 대전 뒤 디올의 여성스러운 '뉴룩'은 패션계 혁명으로 평가받았다. 립스틱은 경제가 불황의 늪을 헤맬 때 더 많이 팔린다.

공포 너머로 탈출

차디찬 공포의 인기가 끓는점을 넘을 기세다. "요즘 극장에서 잘 팔리는 건 히어로물과 공포물밖에 없다." 미국 할리우드의 저예산 호러 영화 제작사 '블룸하우스'를 설립한 제이슨 블룸이 최근 내한해 들려준 말이다.

패션은 판타지로… 영화는 호러로

현실을 잊고 찰나를 체험하기에 공포보다 좋은 쾌락 장르도 없다. 공포영화‘마라’의 한 장면. /스톰픽쳐스코리아

한여름 더위를 쫓는 '납량(納凉)' 장르로만 여겨졌던 것은 옛날 얘기. 요새는 계절과 상관없이 팔려 나간다. 올해 260여만명을 극장가로 불러모아 화제를 모았던 영화 '곤지암'이 개봉했던 때가 3월이다. 지난 6월 개봉한 영화 '유전'도 17만명이나 봤다. 지난 두 달 사이 개봉한 공포 영화만 11편에 달한다. CJ ENM은 '413 픽쳐스'라는 공포 영화 전문 레이블 스튜디오를 론칭했다.


악령을 쫓는 얘기를 그린 OCN 드라마 '손 the guest'는 평일 밤 11시에 방영하지만 지상파를 제외한 채널 중 시청률 1위다.


공포 바람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미국에서 제작한 200억원 미만의 저예산 호러·스릴러 영화 매출은 2017년 1조3700억원을 넘어섰다. 2017년 태국에서는 박스오피스 10위 안에 든 영화 중 두 편이 호러 영화였고, 인도네시아에서도 작년 10위권에 든 영화 중 4편이 공포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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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악령을 쫓는 이야기를 담은 OCN 드라마‘손 the guest’, 시즌 9까지 나온 미국 AMC의 좀비 드라마‘워킹 데드’. /OCN·AMC

30~40대에게 공포는 현실을 증발시키는 쾌락의 동의어로 읽힌다. 변리사 김세주(38)씨는 아침마다 공포물을 한 편씩 보고 출근하는 사람이다. 밤에 보면 너무 무서워서 잠을 제대로 못 잘까 아침에 본다고 했다. "1시간쯤 덜덜 떨고 나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텅 비고 스트레스가 싹 날아가죠. 운동보다 나아요."


10~20대에게 공포는 놀이로 읽힌다. '곤지암'의 정범식 감독은 "이달 초 스페인 바르셀로나 시체스 국제영화제에 갔더니 젊은 관객 수백 명이 공포 영화를 보면서 록 콘서트를 즐기듯 함성을 지르고 환호하더라"고 했다. "예전 세대가 공포를 감상했다면 요즘 젊은 세대는 말 그대로 공포를 갖고 놀더라고요. 롤러코스터처럼 심장을 뛰게 하는 체험으로 여기는 겁니다." 귀신이 등장하는 TV 만화영화 '신비아파트' 시리즈가 10%가 넘는 시청률을 찍고, 외전 드라마 '기억, 하리'가 인기를 끄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많은 이는 전 세계적인 불황과 긴박한 국제 정세가 호러 소비층을 확장시켰다고도 분석한다. 최근 미국 저널리스트 밥 우드워드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쓴 책 이름도 '공포(Fear)'였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미국 부시 대통령 시절에 시리즈물이 크게 늘어났던 것을 기억한다. 전쟁 위협과 불안, 난민 문제 같은 사회 이슈로 인한 대립, 여성과 소수 인종을 향한 혐오 문제에 눈 돌리고 싶은 심리가 공포에 쏠린 것 같다"고 했다.


최보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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