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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by 조선일보

천천히 '걷는' 기차… 눈이 시원해지고 공기가 맛있다

스위스 융프라우 구름 위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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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열차 뒤로 눈 덮인 융프라우가 보인다. 아이거와 묀히의 암벽에 터널을 뚫어 융프라우요흐(3454m)까지 올라간다. 기관사는 “아름다운 자연으로 여행객을 실어나르는 이 직업을 사랑한다”고 했다. / 융프라우철도

가을 점퍼와 긴소매를 서랍에서 꺼냈다. 만년설을 마주하려면 여행 가방에 선글라스와 선크림도 넣어야 한다. 행선지는 스위스 융프라우(해발 4158m). 적어도 두 가지가 특별했다. 한여름에 눈밭을 밟는 '하얀 휴가(white vacation)'라는 점, 평생 가장 높은 고도를 경험한다는 점이었다. 3454m 높이에 있는 융프라우요흐역까지 기차를 타고 오른다지만 한라산 정상(1947m)도 안 가본 몸이 견뎌낼 수 있을까.


'맑음. 체감 기온은 17도.' 지난달 24일 숙소가 있는 해발 566m 인터라켄(interlaken)에서 스마트폰이 알려준다. 이름처럼 '두 호수 사이에' 있는 이 도시는 융프라우 여행객의 베이스캠프다. 남동쪽으로 멀리 눈 덮인 산이 셋 보였다. 왼쪽부터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 눈이 시원해졌다. 고산 지대에 적응할 겸 사흘에 걸쳐 조금씩 높이 올라가보기로 했다.

게으름이라는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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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행선지는 쉬니케 플라테. 해발 1967m에 있는 식물원이다. 온갖 역경을 뚫고 1912년에 개통된 융프라우 철도는 6개 노선과 1개의 제휴 노선이 있다. 무엇보다 느린 게 특징이다. 초속 2m쯤 되려나. 빌더스빌에서 갈아탄 협궤 열차는 느릿느릿 산으로 향했다. 좌우가 뻥 뚫려 있다. 야생화로 물든 들판과 양봉 통, 젖소 떼…. 구부러진 터널을 지나자 침엽수림이 펼쳐졌다.


서늘해지면서 공기 맛이 달라졌다. 아래로 인터라켄과 두 호수가 보인다. 한쪽은 빙하가 녹은 물이라 빛깔이 달랐다.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멋진 풍경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다. 여행객은 곧 깨달았다. 그렇게 바삐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된다는 걸. 그림엽서 같은 비경이 사흘 내내 끊임없이 나타났다.


고속 열차 시대에 시속 10㎞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기차라니. 여느 여행지와는 다른 시차 적응이 필요했다. 게으름의 미덕에 대해 생각할 기회였다. 바쁘게 움직인다고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따금 불행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어쩌면 충분히 게으르지 않기 때문이다.


쉬니케 플라테는 천상의 화원이다. 봉우리와 계곡, 호수까지 숨막히는 경치가 사방에 펼쳐진다. 650종에 이르는 야생화와 고산 식물을 감상하는데 방울 소리가 요란했다. 젖소들이 풀을 뜯으며 움직일 때마다 목에 달린 방울이 울리는 것이었다. 젖소들의 식욕이 작곡한 종들의 대합주랄까. 가이드는 "원래는 목동이 소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려는 목적이었다"고 했다. 꼬르륵. 밥때가 되었다.


호수에서 유람선을 탄 뒤에 저녁에는 케이블카(휘니큘러)를 타고 아찔한 급경사를 올랐다. 10분 만에 754m 상승해 하더 쿨룸(1322m)에 닿았다. 인터라켄과 두 호수는 물론이고 융프라우까지 조망할 수 있는 최적지다. 이곳에 오는 해외 관광객 수 1~3위는 중국과 인도, 한국인이라고 했다. 5~10월이 성수기다. 실제로 그 국적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이날 일몰은 9시. 꾸물거리다 야경까지 눈에 담고 내려왔다. 게으름이라는 사치를 만끽하기로 했다.

액티비티 천국 휘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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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에 펼쳐져 있는 알레취 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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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르스트에서 여행객들이 플라이어(집라인)를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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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 특설 코트에서 한국 남자 핸드볼 대표팀이 스위스 프로팀과 친선 경기를 했다. / 박돈규 기자·융프라우철도

한 스위스 여행 카페가 인터라켄 관광지를 놓고 인기 투표를 했다. 응답자들은 휘르스트를 1위, 융프라우를 2위로 꼽았다. 휘르스트에 가면 풍광 외에도 즐길 거리가 많아 가성비가 높아진다는 뜻이다. 둘째 날 행선지가 휘르스트였다.


해발 2168m에 있는 휘르스트는 액티비티 천국이다. 플라이어(집라인), 글라이더, 마운틴 카트, 트로티 바이크(자전거)…. 휘르스트에 가려면 기차로 인터라켄을 출발해 아기자기한 산악 마을 그린델발트에서 내린 다음 6인승 곤돌라로 갈아타야 한다. 올해 10월 28일~11월 29일은 곤돌라 점검 기간. 곤돌라가 멈추고 액티비티도 운영하지 않으니 이 시기는 피하시길.


위험해도 좋다는 각서를 썼다. 최고 시속 84㎞로 800m를 하강하는 플라이어, 비포장 길을 운전해 내려오는 마운틴 카트를 체험했다. 플라이어를 탈 땐 기대와 불안이 뒤범벅됐다. 앞은 까마득한 내리막. 줄을 꽉 잡았다. 짧은 카운트다운 후 철커덩, 문이 열렸다. 평소 바이킹 타기도 겁내는 중년 남자가 허공으로 미끄러졌다. 눈을 감았다 떴다. 눈에 눈 쌓인 고봉들이 보였다. 딸랑 딸랑 딸랑. 젖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는 소리가 들렸다. 에라 모르겠다 손을 놓았다. 바람의 결이 느껴졌다.


전망대에서 90분쯤 하이킹을 하면 호수에 비친 알프스산을 감상할 수 있는 바흐알프제가 나온다. 벼랑을 따라 걷는 클리프 워크는 아찔한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발 밑은 낭떠러지. '아름다운 것은 위험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마운틴 카트로 해발 1570m 보어트까지 조심조심 운전해 내려왔다.

6만년 된 빙하 앞에 서다

이곳에 여러 번 와봤다는 한 여행사 대표는 "아이거 북벽의 무늬가 달라졌다"고 했다. 숱한 등반가를 삼킨 수직의 아이거 북벽은 '하얀 거미'라던 예전 그 모습이 아니었다.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최근 보도된 아이슬란드의 빙하 장례식처럼 알프스 만년설도 녹고 있다.


간밤에 비가 많이 내렸다. 셋째 날 드디어 융프라우에 올랐다. 그린델발트를 거쳐 기차를 두 번 갈아타야 갈 수 있다. 출발하기도 전에 고산병을 근심했다. 백두산 높이인 2750m를 넘자 머리가 아파왔다. 전문가가 일러주는 대로 심호흡을 했다. 휘파람을 불어도 좋단다. 물을 많이 마시고 추위를 느끼기 전에 옷을 껴입으니 견딜 만했다. 고산병 특효라는 비아그라는 필요하지 않았다.


산 정상은 기온이 내려간다. 4~9도. 이날 한국 남자 핸드볼 대표팀은 융프라우에 있는 알레취 빙하에서 스위스 프로팀과 이벤트 경기를 했다. 기압이 낮아 더 딴딴해진 공을 놓치기 일쑤였다. 스위스 선수의 슛이 골대를 넘어 빙하로 굴러가는 바람에 공을 바꾸기도 했다.


자연(自然)은 한자 그대로 '스스로 있는 존재'다. 이날 융프라우는 변화무쌍한 구름에 휩싸여 있었다. 약 6만년 전에 형성된 빙하는 '특별한 무언가는 되지 못해도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종종 산이나 바다, 빙하처럼 인간이 아닌 것과 접촉하고 싶어 하는 까닭을 새삼 깨달았다. 잊을 수 없는 사흘이었다.

여행정보

  1. 교통 : 대한항공만 스위스 취리히로 주 3회 직항 운영한다. 인터라켄까지는 취리히에서 기차로 2시간 30분.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고속 열차 ICE를 타면 5시간 13분 걸린다.
  2. 시차 : 한국이 7시간 빠르다.
  3. 화폐 : 스위스프랑 환전할 것.
  4. 주의 : 기차에서는 소매치기 조심. 이마엔 선크림을 바르지 말 것. 땀과 함께 눈에 들어가면 따갑다.
  5. 문의 : 동신항운 홈페이지에서 요긴하고 다양한 정보와 할인 쿠폰 등을 구할 수 있다.

융프라우(스위스)=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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