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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승강장 앞… 갓 구운 피자 가게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조각피자

조선일보

서울 신도림역 1호선 1번 승강장에 있는 ‘그랜마파이’의 조각 피자.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신도림역은 서울 그 자체였다. 부산에 2호선이 없던 시절, 환승이라는 걸 모르고 살던 나에게 출근 시간 신도림역에 가득 찬 사람들 물결은 아득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환승하려면 1번에서 8, 9번까지 이어지는 플랫폼을 헷갈려 몇 번씩 지상 플랫폼과 역사를 오르락내리락했다. 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신도림역에는 호텔과 쇼핑몰, 백화점이 새로 생겨 더 거대하고 복잡해졌다.


굳이 신도림역을 찾은 것은 피자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신도림역 1번 출구 근처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출구가 아니라 신도림역 1번 플랫폼이었다. 피자집에 가려고 역사로 들어갔다. 기역 자로 꺾인 널따란 계단을 올라 1번 플랫폼에 도착했다. 광활한 플랫폼 한구석에서 조각 피자를 파는 가게가 거짓말처럼 장사하고 있었다. 가게 이름은 ‘그랜마파이’였다.


가게 전면은 창으로 되어 있어 안이 훤하게 보였다. 주인장은 홀로 피자를 굽고 손님을 맞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점심시간이었지만 가게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침 7시에 문을 열기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식사 겸 피자를 많이 사 갈 것 같았다. 10년 전에는 조각 피자를 자주 먹곤 했다. 호주 멜버른 주방에서 일할 때, 자정 무렵 퇴근할 때면 배가 고파서 바로 집에 갈 수가 없었다.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 우유, 맥주 같은 것을 손에 잡히는 대로 사 먹었다. 그도 아니면 한 조각에 1달러가 조금 넘던 조각피자집에 갔다. 진열장에 몇 시간이고 놓여 있었을 조각피자는 겉은 마르고 속은 눅눅했다. 피자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아쉬운 그 밀가루 반죽을 입에 욱여넣으면 헛배가 불렀다.


그러나 ‘그랜마파이’ 진열장에 들어찬 피자는 한눈에 봐도 두께가 상당했고 위에 올라간 토핑도 흘러내릴 듯 푸짐했다. 웃는 낯으로 손님을 맞는 주인장은 가게 안에서 먹을지 포장할지 물어봤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포장만 해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주인장은 새벽에 피자를 한 번 굽고 점심나절에 다시 한 번 반죽을 오븐에 넣는다고 했다. 가게 안에는 피자를 먹는 방법부터 이 집 피자의 특징까지 안내가 붙어 있었다. 수더분한 주인장이 커다란 오븐을 열고 닫았다. 열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흘낏 보며 바쁜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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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림역 내부 승강장 앞에 있는 '그랜마파이'. /유튜브

이 집 이름을 딴 ‘그랜마파이’는 미국 치즈인 몬트레이잭과 모차렐라, 그리고 체다 치즈 3종이 올라갔다.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일반 피자보다 두세 배 두꺼운 피자 도우는 질감이 가볍고 폭신했다. 반면 바닥은 지지듯이 구워서 바삭했다. 녹아내리는 치즈는 오래된 군내 없이 향이 깨끗하여 느끼하거나 물리지 않았다. 피자와 따로 낸 토마토 소스를 듬뿍 뿌렸다. 차갑고 상큼한 소스 덕에 뜨거운 피자 먹기가 한결 편했다. 뜨겁고 차가운 감각의 대비가 주는 쾌감은 덤이었다.


피자 도우는 이탈리아 빵 포카치아와 비슷했지만 조금 더 가벼운 질감이었다. 알고 보니 반죽 발효에만 3~4일이 걸린다고 했다. 철판으로 밑을 지져 바삭하게 내는 방법은 시카고 피자 방식이었지만 그렇다고 시카고 피자는 아니었다. 허허실실(虛虛實實), 수더분하게 웃는 주인장 머릿속에는 피자와 피자를 먹는 사람들에 대해 은밀한 복선을 짜는 추리소설 작가처럼 수십 가지 경우의 수가 들어가 있었다.


‘스파이시 치킨 올리브’는 매콤하게 양념한 닭고기와 시큼한 올리브, 그리고 달콤한 맛이 올라오는 양파를 조합했다. ‘가든 하베스트’는 양파, 피망, 소시지, 페퍼로니를 같이 올려 예전에 먹던 콤비네이션 피자를 먹는 듯했다. ‘할라피뇨 하와이안’은 파인애플, 치킨, 햄, 할라피뇨 고추로 짝을 맞췄다. 이탈리아 본토였다면 상상하기 힘든 달콤하고 매콤한 맛이 하나로 묶여 시원시원하게 자기 목소리를 냈다.


들어보니 이 피자 집 때문에 전철 환승이 힘들어졌다는 말도 있었다. 바쁜 서울의 아침, 신도림역을 오가는 무표정한 사람들 사이로 스며드는 피자 냄새를 떠올렸다. 새벽부터 반죽하는 주인장은 아마 그들에게 인사하듯 피자를 굽고 또 구울 것이다. 누군가는 그 피자 한 조각에 하루를 조금은 가볍게 시작할 수 있으리라. 혹은 매일 아침 열차를 타고 내리면서, 낯선 이의 사소한 친절이 그렇듯 그 피자 냄새에서 어떤 위안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우리가 서로에게 친절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듯 그 정도면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다.

#그랜마파이: 그랜마파이 피자 조각 3300원, 가든 하베스트 조각 3900원, 스파이시 치킨 올리브 조각 4300원.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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