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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이봉창의 ‘두 얼굴’... 과연 어느 쪽이 진짜인가

보물 지정예고 자료에 등장한 뜻밖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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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에서 지난 1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한 문화재 중 20세기의 유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속에 적힌 내용과 역사적 의미가 아니라면 그다지 문화재적 가치가 없었을 종이 한 장. 그것은 1931년 12월 13일 작성된 ‘이봉창 의사(義士) 선서문’이었습니다.


‘’나는 赤誠(적성)으로써 祖國(조국)의 獨立(독립)과 自由(자유)를 回復(회복)하기 爲(위)하야 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의 一員(일원)이 되야 敵國(적국)의 首魁(수괴)를 屠戮(도륙)하기로 盟誓(맹서)하나이다. 大韓民國(대한민국) 十三年(십삼년) 十二月(십이월) 十三日(십삼일) 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 앞 宣誓人(선서인) 李奉昌(이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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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가 1932년 1월 일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기 직전인 1931년 12월 작성한 선서문. /문화재청

여기서 ‘적성’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이란 뜻이고, ‘대한민국 십삼년’이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삼는 연호이니 1931년이 됩니다. ‘적국의 수괴’란 누구였을까요. 바로 일왕 히로히토(裕仁)였습니다. 일제 침략의 맨 꼭짓점에 있는 일왕을 저격하겠다는 결의였습니다. ‘한인애국단’이란 당시 임시정부의 김구가 창설한 독립운동 단체였습니다.


이날 선서문 서명을 마친 이봉창(1900~1932) 의사는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문을 가슴에 단 채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촬영 장소는 한인애국단의 임원이자 안중근 의사의 막냇동생인 안공근의 집이었습니다. 이 장소의 의미는 큽니다. 이렇게 이봉창은 의거(義擧)로써 안중근 의사를 계승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김구와 안공근의 관계는 무척 좋았습니다. 저는 안공근의 실종에 김구 세력이 관련됐다는 설과 그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소개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https://www.chosun.com/entertainments/music/2022/08/26/76EDBNQ3EFESTLS4YQPC5RDX4M/)


그런데, 이 ‘보물 지정 예고’ 보도자료에서 문화재청이 당시 촬영한 사진이라며 첨부한 사진이 있었습니다.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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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이 2022년 10월 31일 배포한 보도자료 중 '이봉창 선서문'과 관련된 사진자료.

분명 의아해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이봉창 의사 사진은 저 사진이 아니었는데!” “그건 거사를 앞두고 활짝 웃고 있는 표정이었는데!” “저렇게 뭔가 우울하고 불안한 표정이 아니었는데!” “뭔가 이상한데...!”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여러분이 기억하고 계실 사진은…


바로 이 사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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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세히 보십시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사진에서 이봉창 의사의 얼굴은 몸에 비해 좀 커서 신체 비례가 다소 부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포토샵이 없던 옛날 사진에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긴 합니다만, 태극기의 경계선과 손, 옷소매 부분은 누군가 펜으로 그린 흔적이 선연하게 보입니다. 선서문은 당시 카메라의 화질로 촬영됐다기엔 너무나 선명한데다 맨 위 사진에 나온 선서문 원문과 비교하면 좀 다릅니다. 누군가 사진 위에 선서문의 내용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두 사진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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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을 사진A, 오른쪽 사진을 사진B라고 할 때, 사진B가 실제 현장에서 촬영된 원래 사진이라는 것이 보다 분명히 드러납니다. 앞에서 비친 조명을 받아 왼손과 오른쪽 뺨을 밝히고 있고, 선서문의 글씨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태극기의 가장자리도 선명하지 않고, 무엇보다 광원 반대쪽인 벽과 태극기에 인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뜻밖인 것은, 수류탄을 들고 있는 그의 표정이 대단히 어둡고 근심 어린 듯한 모습이라는 데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뤘던 것이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이 2008년에 썼던 이봉창 의사의 전기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너머북스) 였습니다. 제목의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란 이봉창 의사가 일본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지었던 일본식 이름이었습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계간 ‘역사비평’을 발간하는 학술단체고, 배경식 부소장은 성균관대 사학과 출신의 연구자입니다.


그는 사진A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다른 사진에서 활짝 웃는 얼굴을 오려 붙인 합성 사진이다. 수류탄을 든 두 손과 배경의 태극기는 그린 것이 분명하고, 선서문도 원본의 필체와는 다르며, 자세히 보면 얼굴의 목선도 보이지 않는다.”


얼굴만 오려 붙였다는 그 ‘다른 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은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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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애국단의 의열활동 기록을 담은 ‘도왜실기(屠倭實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가 있던 해인 1932년 상하이에서 처음 출간됐습니다. 그런데 이 초간본 ‘도왜실기’에 실렸던 이봉창의 사진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로 사진B였습니다. 어둡고 우수에 찬 표정을 띤.


그럼 우리에게 익숙한 사진A는?


이것은 1945년 이전까지 발간된 어느 출판물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사진이었다는 것입니다. 1964년 3월에 국내에서 처음 출간된 ‘도왜실기’의 한글판에서야 처음 출현한 사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도왜실기’의 초판본에 있던 사진B는? 한글판에선 빠졌습니다. 무슨 얘길까요. 수류탄을 들고 ‘삶을 초월한 듯’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봉창의 사진은 광복 이후 ‘도왜실기’를 낸 사람들이 새롭게 창안해 낸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의 영웅 이봉창이 거사 직전 이토록 어둡고 불안 어린 표정을 지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활짝 웃는 얼굴로 일종의 조작을 했다는 것이 되죠.


그 ‘어두운 표정’은, 죽음을 앞둔 서른한 살 식민지 청년의 차마 숨길 수 없는 한 조각 불안감이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중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보통 조선 청년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란 사람도 아니었고, 농민운동이나 계몽운동 활동을 벌이던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일본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며 더 나은 삶을 꿈꿨던 평범한 식민지 청년이었고, 이제 막 수입돼 유행하던 자본주의 소비 문화를 향유한 ‘모던보이’였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냉혹한 현실에 눈을 떴고,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가가 되는 극적인 반전을 이뤄낸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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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주가 1928년 그린 '모던보이의 산보'. 서양식 모자와 나팔바지 차림 모던 보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왼쪽 남자는 바이올린을 들었다.

아직 일제가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을 요구하지도 않았던 시기에 일본식 이름을 지녔던 것이 이봉창 의사가 비판을 받을 부분이라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봉창은 어느 시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도 마땅히 할 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봉창은 “일본인의 습관을 빨리 배워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성공한 인생을 꿈꾸며 불철주야 노력했습니다.

12세 때부터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일했던 이봉창은 17세였던 1918년 용산역에 취직해 4년 동안 역무원과 운전 수습생 등으로 근무했습니다. ‘용산역에 취직했다’는 것은 요즘 같으면 IT 대기업에 들어갔다는 것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 철도는 당시의 최첨단 교통수단이었고 용산은 한반도 철도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유리천장’을 느끼게 됩니다. 조선인 직원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본인에 비해 승진과 봉급에서 철저히 차별을 겪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용산역에서 하위 기술직급인 기수(技手)직의 경우 일본인의 평균 월급이 126원이었던 데 비해 조선인은 68원으로 겨우 54% 정도에 그쳤습니다. 같은 직급이 그랬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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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용산 철도기지에서 국내 기술자들이 처음 만든 기차 '조선해방자호'. /코레일

이봉창은 ‘차라리 일본으로 가서 일하는 게 오히려 차별이 덜하다’는 말을 듣고 당시엔 ‘내지(內地)’라 불리던 일본으로 갔습니다. 철공소 등 여러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했고, 독신으로 살기에는 여유를 누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었던 것 같습니다. 여가 시간에는 술 마시고 카페에 가거나 영화를 보고 골프를 치는가 하면, 음악 듣고 마작을 하거나 유곽을 찾는 일도 즐겼다고 합니다. 이런 그를 보고 ‘근대의 최신 소비문화를 누렸던 모던보이’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1928년 11월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이 인생 행로를 바꿉니다. 일을 하루 쉬면서까지 즉위식을 보러 갔으나 경찰이 그를 수색하며 한글 편지를 발견하곤 일주일 동안 유치장에 구금했던 것입니다. 지난 일을 곰곰이 돌이켜본 이봉창은 이렇게 결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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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 히로히토.

“조선인 주제에 일본 임금 같은 것을 볼 필요는 없다는 것 아니냐? 이제 우리 이천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해야겠다.” 그 누구의 계몽이나 감화를 받지 않고 스스로 겪은 현실 위에서 민족 의식에 눈을 뜨게 됐던 것입니다.

1931년 중국으로 건너간 이봉창은 안공근을 만나 그의 소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알게 됐습니다. 이봉창의 일본어가 너무나 유창했고 상하이에서 만난 일본인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심지어 의거를 위해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을 때 부두로 배웅 나온 일본 경찰도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임정 인사들은 그를 밀정이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유일하게 그를 믿었던 사람이 바로 김구였다고 합니다. 그 김구조차도 100% 믿지는 못해 자신의 이름을 당시 쓰던 가명인 ‘백정선’으로 알려줄 정도였습니다.


이 무렵 임정 인사들과 함께 했던 술자리에서 그는 엄청난 말을 해서 좌중을 놀라게 했습니다. “왜황을 도살하기는 극히 용이한데 왜 실행하지 않습니까? 내가 도쿄에 있을 때 어느 날 천황이 행차해서 내 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 ‘이때 내가 총이나 작탄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찌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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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애국단장 김구(왼쪽)와 윤봉길 의사.

이것은 취중진담이었습니다. 그는 며칠 뒤 김구(이봉창 자신은 여전히 백정선으로 알고 있던)를 만나 의거의 뜻을 밝혔습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결코 김구가 억지로 시킨 일이 아니었습니다. 윤봉길은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며 선서문을 쓴 4일 뒤 상하이를 떠나 일본으로 갔습니다. 1932년 1월 8일, 마침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사쿠라다몬(櫻田門) 의거가 일어났습니다. 이봉창은 도쿄 교외에서 열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 일왕 일행의 두 번째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폭탄은 명중했지만 일왕은 첫 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 옛날 장량의 진시황 암살이 실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일왕도 여러 대의 가짜 마차를 보안용으로 가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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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의 사쿠라다몬 의거 직후의 모습.

저는 이봉창 의거 중 바로 이 대목에서 가장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당황한 일본 경찰이 이봉창이 아니라 이봉창 근처에 있던 일본인이 폭탄 투척자인 줄 알고 구타했습니다. 몸을 피할 기회일 수도 있었지만 이봉창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던졌다! 숨지 않을 테니 점잖게 다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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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직후 체포 연행된 이봉창 의사.

1932년 9월 30일 일본 재판부는 이봉창에게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됐습니다. 이봉창의 나이 만32세였습니다.


그럼 그것은 그대로 실패한 의거였을 뿐일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쿠라다몬 의거는 커다란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일왕에 의해 반려되긴 했지만 일본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내각이 총사퇴를 선언할 정도로 일본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중국의 민국일보는 이봉창 의거를 보도하면서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고 써서 일본이 상하이 사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의열투쟁은 곧바로 같은 해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의 윤봉길 의거로 이어졌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같은 요즘 TV 프로그램에서 가끔 이치에 닿지 않은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진짜로 독립이 이뤄질거라고 생각해서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라 그걸 기록으로 남기려 했을 뿐”이라는 식입니다. 정말 웃기는 소립니다.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비롯한 끈질긴 독립 투쟁이 없었더라면 1943년 연합국이 카이로 선언에서 ‘일본이 강제 점거한 모든 영토를 탈환한다’고 했을 때 한국은 여기서 제외돼 전후에도 일본 영토로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독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봉창 의거에 대해, 무척 기억에 남는 추도사가 있습니다. 과기처 장관과 문화일보 사장을 지낸 김진현 전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장의 2002년 이봉창 의거·순국 70주년 기념식 추도사입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당시 아시아 민족운동 중에서도

유일하게 일왕을 직접 저격한 쾌거였다.

해외 항일독립운동을 재집결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더욱 굳건히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폭탄은 근대 항일 독립운동의 가장 큰 폭음이었으며

일본 군국주의의 원천인 ‘천황’ 신화를 깨는

문명의 큰 종소리, 인간의 고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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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 /장련성 기자

이제 이봉창의 ‘두 얼굴’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비록 ‘적국 수괴 도륙’이라는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거사를 수행한 위대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인(超人)은 아니었습니다. 결코 모든 순간 확신에서 1%도 벗어나지 않은 인물이 아니었다는 얘깁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발을 땅에 딛고 사는 곳에서 스쳐가고 마주치는 그 숱한 사람들처럼, 열심히 살고 돈을 벌어 성공하고 싶어했고, 새로운 문화를 맛보며 지극히 개인적인 여가 생활도 즐기며 살고 싶어했던 서른 갓 넘은 청년이었습니다.


의거 전 태극기 앞에서 폭탄을 들고 촬영했던 사진의 원본인 사진B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젊은이의 주저함과 망설임과 두려움의 편린이 스쳐지나가는 바로 그 순간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제 그걸 굳이 걷어내고 다른 사진과 합성할 필요조차 없는 세상이 됐다고 보는 것이 온당합니다. 이봉창은 스스로의 각성을 거쳐 최후의 순간에 그 평범함을 불멸의 의지로 승화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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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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