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신문, 유튜브... 3개 눈으로 시대 읽어" 40년간 블루오션, 지춘희
40년 간 전성기, 디자이너 ‘지춘희 코드’의 비밀
"중요한 건 사람, 동네, 자연… 억지로 되는 일 없어"
지스튜디오 론칭 1년만에 1000억 돌파, 홈쇼핑 역대급 매출
청담동 이어 성수동 골목 시대 열어… 블루보틀 유치로 상권 활성화
디자이너 지춘희. 1979년 ‘미스지콜렉션’을 론칭한 이후 40년 간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CJ오쇼핑에서 시작한 지스튜디오는 론칭 1년만에 1000억 브랜드로 대박을 터뜨렸다./사진=김지호 기자 |
패션지 <보그>에 있던 시절, 피처디렉터의 눈으로 여러 패션쇼를 참관했다. 다소 시니컬한 관찰자의 눈으로 배낭을 배고 운동화를 신은 채 파리와 뉴욕과 서울의 쇼장을 오갔다. 컬러풀한 수트에 곰방대를 물고 걷는 장 폴 고띠에 오뜨꾸띄르부터 쿨하기 그지없는 아디다스 쇼까지, 압도적인 스케일의 수많은 쇼를 보았지만, 드는 생각은 대개 비슷하다.
‘근사해. 하지만 내가 입고 싶진 않아.’
그런 의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쇼는 지춘희 쇼다. 뭐랄까. 지춘희쇼는 흥겨운 잔칫집 분위기가 났다. 진귀하고 고운 것을 들고 온 방물장수 옆에 사람이 모이듯, 까탈스러운 프레스들도 낭만적 정취와 현실 감각을 두루 갖춘 지춘희 쇼장에서는 화색이 돌았다. 블라우스, 수트, 원피스, 코트, 그리고 늘 엔딩을 장식하는 드레스까지. 보고 나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저건 내가 당장 입고 싶은 옷이군!’
쇼의 메시지도 일관됐다. ‘여자를 여자답게!’ 옷은 비평과 유행의 대상이 아닌, 환희와 즐거움의 세계였다. 그렇게 지춘희가 지휘하는 공간, 지춘희가 만든 옷은 한 사람을 가장 자연스럽고 밝게 비추는 마력이 있었다.
90년대 심은하, 이영애가 입었던 ‘청담동 며느리룩'이 그랬고, 2000년대 장진영이 소화했던 진취적인 시대 의상이 그랬다. 이나영과 원빈의 결혼식은 지춘희의 드레스와 턱시도, 부드러운 밀밭이 어우러져 한 점의 풍경화로 기억된다.
1979년 ‘미스지콜렉션'을 론칭한 이래 40년간 변함없이 동시대 여자들의 마음과 지갑을 열게 한 ‘지춘희'가 나는 늘 궁금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백화점 판매를 고집하던 그녀가 얼마전 홈쇼핑 시장에 나와 역대급 히트를 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춘희를 만나러 갔다. 여행을 자주 떠나는 그녀와 스케줄이 엇갈려 봄에 만나기로 한 약속이 어느덧 초가을이 되어 성사됐다.
2018년 8월 CJ 오쇼핑에서 시작한 지춘희의 새로운 브랜드 ‘지스튜디오'는 론칭 첫 방송 2시간만에 45억, 당해 가을 시즌 다섯 번 방송만에 누적 판매금액 100억을 기록했다. 지난 8월엔, 론칭 1년만에 누적 판매 금액 1000억이라는 홈쇼핑업계에 기록적인 수치가 나왔다.
인터뷰는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한번은 청담동 미스지콜렉션에서, 또 한번은 생산 공장이 있는 성수동에서. 붉은 벽돌이 고풍스러운 성수동 건물엔 블루보틀이 입점해 있고,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 사이드에서 트렌드의 최선에 있는 지춘희는 평소 ‘여행, 신문, 유튜브'라는 3개의 눈으로 시대를 읽는다고 했다.
한국 여자의 체형을 가장 잘 이해하는 디자이너 지춘희./사진=김지호 기자 |
-지춘희가 홈쇼핑에 진출하면서 홈쇼핑 시장의 판도가 바뀌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프리미엄 콘텐츠 시장이 활짝 열렸지요.
"딱 1년 됐네요. 작년 8월 즈음에 시작했으니까. 성과가 나서 좋죠. 자기 이름 걸고 하는 브랜드로, 내가 CJ오쇼핑 전체 매출 1위일 거예요. 그걸로 오프라인을 유지해요(웃음). 어찌 보면 그동안 생각했던 지스튜디오(g studio)라는 젊은 세컨 브랜드를 홈쇼핑으로 푼 거죠."
-단번에 소비자를 끌어들인 비결이 궁금합니다.
"(미소 지으며)제일 경계하는 말이 ‘홈쇼핑 같아'였어요. 피팅부터 라인 검수할 때 옷이 ‘홈쇼핑 제품 같아 보이면' 다시 처음부터 했어요."
-홈쇼핑인데 ‘홈쇼핑 같아보이는 제품'에서 탈피하는 게 목표였다?
"비슷해지는 걸 경계했죠. 하도 까다롭게 굴어서 만드는 사람들이 싫어할 거야(웃음). 소재도 이태리 원단 회사에서 수입해요. 손해를 안보는 선까지 원가를 높여요. 소량으로 하면 그 단가를 못 맞추는데 대량으로 하니까 가능하더라고요. 가격대가 좋으니, 요즘에 배우들 만나면 그걸 사입고 오더라고(웃음). 홈쇼핑이라도 충성도가 높은 편이에요."
-현재 CJ엔 지춘희(지스튜디오), GS엔 손정완(SJ와니)이 대표 디자이너예요. 서로 긴장이 있을 법도 합니다만.
"경쟁같은 거 안해(웃음). 우린 다른 세계에 살아요."
-어쨌든 가장 늦게 들어가 단번에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타이밍을 생각했는지요?
"그런 거 없어요. 십수년동안 제안이 왔어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엔 담당 PD와 MD가 워낙 저돌적으로 밀어 붙였어. 거기서 확신을 했죠. 브랜드를 선점하려면 그만한 저돌성은 있어야 해요. 사실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런 사람이 드물어. 제대로 확신을 갖고 밀어붙이는 사람만 있으면 의외로 일이 쉽게 만들어지죠."
복잡한 분석보다 직관적이고 심플한 답변이 돌아왔다. 온라인 오프라인의 파워게임은 이미 끝났고, 시장은 ‘가성비' 좋은 프리미엄 상품을 원했다. 하지만 지춘희 프로젝트의 중요한 열쇠는 역시나 사람이었다.
CJ오쇼핑의 담당자들은 지춘희와 함께 방송 한 편을 고급스러운 ‘컬렉션'처럼 연출했다. 디테일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니트 티셔츠는 1만 8천벌을 한땀한땀 뜯어서 다시 만들어 내놓기도 했다.
-저돌적인 사람을 좋아하시죠?
"네. 좋아해요. 열심히 사는 젊은이를 아주 좋아해요."
성수동 ‘미스지콜렉션' 건물에 입점한 커피브랜드 ‘블루보틀’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동네 분위기를 ‘힙하게' 바꾸고 주변 상권을 활성화시켰다는 평가다./조선DB |
-1세대 디자이너 중에 가장 최전선의 소비시장에 지춘희가 있다는 게, 저는 늘 신기했어요. 70년대 명동 맞춤복 시절에서 90년대 청담동을 거쳐, 이젠 2019년 성수동 시대를 맞았습니다.
"명동시절엔 옷이 많지 않았어요. 귀한 대접을 받았죠. 지금은 옷이 쏟아져나오는 시대예요. 나는 늘 당대를 즐겁게 사는 사람이니까. 남보다 반발짝만 앞서 걸으려고 해요."
-‘그 반발짝 앞서’가 가장 어렵습니다. 세태의 흐름이 너무 빨라 덩치 큰 명품업계도 스트리트 패션에 접속하느라 바빠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계속 바꿔가면서요.
"지금은 길거리가 모든 것의 주인이니까요. 개성도 목소리도 분방하게 터지는 건 좋아요. 그런데 나는 그걸 좀 품위 있게 정리해주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길거리 음식도 좋지만, 건강한 음식도 먹어야 생활의 질서가 잡히듯. 이를테면 나는 좀 정리정돈을 해주는 역할인 것 같아요."
-지난 4월엔 성수동 ‘미스지컬렉션' 건물에 블루보틀이 입점해서 거리에 활력이 넘칩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밀려들죠. 예상하셨나요?
"(미소 지으며)내 취미가 동네 탐험이에요. 사람들 모여 사는 동네에 관심이 많죠.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새로운 동네, 골목을 걸을 수 있어서예요. ‘미스지콜렉션' 쇼룸은 청담동에 있지만, 생산 공장은 성수동에 있었어요. 이번엔 디자인실도 성수동 건물로 일부 또 옮겨가요. 내가 좋아한 건 이 동네의 자연, 에너지, 사람들이었어요.
블루보틀은 아오야마에서 먼저 가봤어요. 컵 하나로 간결하게 표현된 상징도 맘에 들고, 어딘가 모르게 브랜드가 지닌 진실성이 보였죠. 블루보틀이 오면 동네의 무게를 잡아주고, 재밌어질 것 같았어요. 유치하느라 애를 좀 썼죠(웃음). 성수동엔 공장도 카페도 많지만, 이후엔 뭔가 이야기가 하나로 정리되는 느낌이에요. 새로운 물길이 생겼달까. 그렇게 동네에 들어온 이웃 젊은이들이 저하곤 또 허물없이 친구가 돼요. 고맙죠."
모든 대답이 자연스럽고 억지가 없어, 귓바퀴에 힘을 줬던 나는 매번 기운이 빠졌다. 지춘희의 옷에도, 지춘희의 생각에도 특유의 ‘바람 구멍'이 있다는 말이 실감났다. 그것이 변화무쌍한 패션산업계에서 오랜 시간 ‘지춘희다움’을 유지시킨 힘이 아닌가 싶었다. 역설적이게도 힘을 주는 게 아니라 힘을 빼서 나오는 비상한 기운.
-그런 아이디어와 추진력은 여행을 통해 몸에 밴 것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어쩌면 여행이 나를 구원하는 것 같아. 나도 궁금한 게, 내가 어떤 장소에 꼭 가야만 하는 지 그 이유를, 나 자신도 모른다는 겁니다(웃음). 그냥 일단 떠나요.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생각이 정체되니까. 낯선 곳에 나를 놓아두는 거예요. 그러면 자연스레 가야할 길이 찾아져요. 나는 예전부터 지도보는 걸 그렇게 좋아했어요. 지금은 구글 지도가 있지만, 예전엔 지도책만 따로 보기도 했어요. 요즘엔 여행책을 많이 봐요."
-그렇게 쌓인 빅데이터가 상당하겠습니다.
"좋은 유적, 건축물, 젊은이들이 가는 힙한 곳, 험한 곳, 골목길, 독특한 호텔, 좋은 식당… 다 훤하죠. 누가 등 떠밀어 가라고 한 게 아니잖아요(웃음). 밤새 야간 비행기를 타고 왔으니 입에 단내가 나도록 발품을 파는 거에요. 그곳 토박이들도 혀를 내둘러요. 언젠가는 아프리카를 경비행기 5대 갈아타고 다니는 루트도 짰어요. 극성이죠. 하하.
여행은, 어쨌든 돈과 시간과 체력이 드는 일이잖아요. 그 여건을 소중히 써야죠. 그래서 난 뭘 먹고 뭘 보고 어디서 잘지, 최대한 효율적으로 루트를 짜요. 천성적으로 그 일을 좋아하나봐."
여행하는 것과 여행 루트를 짜는 것을 둘다 좋아한다고 했다. 일과 휴식의 동시성, 바쁨과 여유의 동시성, 두 개의 시간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 중첩되는 지점이 신선했다.
“세상 돌아가는 걸 다 보죠. 옷을 제일 안 찾아보고,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가장 많이 보나봐요.”/사진=김지호 기자 |
-최근엔 어디를 다녀왔습니까?
"이번엔 스코틀랜드를 거쳐 아이슬란드까지 갔어요. 남들은 오로라 보러 간다던데 난 이끼만 보다 왔어요.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이끼가 덮힌 곳은 처음 봤어. 올리브 그린부터, 산밑 그린까지… 빛에 따라 달라지는 그린의 모든 걸, 아이슬란드에서 봤죠.
이끼는 놀라운 세계더군요. 햇빛에 바랜 양철집들도 좋았어요. 우리나라 60~70년대 풍경과 북유럽 느낌이 섞인… 화이트 컬러 하나에도 100가지 바리에이션이 있더군요. 그렇게 저장된 기억이 어느 순간 쑥 디자인으로 풀려나와요."
-여행으로 감각을 업데이트하는 것 외에 시대와 호흡하기 위해 또 무슨 노력을 하나요?
"세상을 많이 들여다봐요. 종이 신문과 유튜브로. 종이 신문은 예전엔 5개 봤는데, 지금은 종합지, 경제지 합쳐서 4개만 봐요. 잉크 냄새도 맡고, 한장 한장 넘겨가며 통으로 정제된 이슈를 소화하죠. 유튜브에는 세상의 온갖 아우성, 날 것의 정보를 봐요. 길거리 패션도 보고, ‘연애의 맛' 류의 요즘 사람들 연애하는 것도 보고, 연예가십이나 정치 채널도 봐요. 세상 돌아가는 걸 다 보죠. 옷을 제일 안 찾아보고,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가장 많이 보나봐(웃음)."
-어쩌면 사랑하는 모습을 담은 유튜브를 많이 보는 것도 지춘희 룩의 본질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때 지춘희 스타일은 ‘청담동 며느리룩’을 만들어 냈지요. 드라마 ‘청춘의 덫'의 심은하, ‘불꽃'의 이영애 의상의 단아함이 기억나는군요.
"(미소지으며)청담동 며느리룩은 그냥 갖다 붙힌 말이에요. 나데는 옷이 아니니까. 내 옷의 특징이 그래요. 대놓고 들이대질 않아. 들이대는 옷은 노골적이고 또 뭐가 주렁주렁 붙잖아요. 내 옷은 반듯하지만 관능적이기도 한데, 그게 그 안에 ‘바람구멍'이 있어서예요. 아무튼 내숭떠는 옷은 확실히 아니에요(웃음)."
지춘희의 뮤즈였던 심은하. 결혼식에서 지춘희가 지은 드레스를 입은 단아한 모습. |
-개인적으로 저는 여배우 장진영이 청룡영화제에서 입었던 물방울 무늬 드레스나 영화 ‘청연'의 의상을 좋아해요. 장진영은 새 작품들어갈 때마다 가장 먼저 선생을 찾아뵌다고 제게 얘기했는데, 당시에 두 사람이 많이 닮았다고 느꼈어요.
"요즘도 진영이를 생각하면 생각하면 잠이 안와요. 영화 ‘소름'때부터 봤는데 열정도 감각도 탁월해서, 대본 놓고 같이 머리를 싸맸어요. 마지막 드라마까지 같이 했죠."
-최근엔 누가 기억에 남습니까?
"(잠시 생각하나)아이유가 떠오르네요. 그 아이가 신인 때 ‘유랑극단' 컨셉으로 여럿이 우루루 촬영한 적이 있는데, 작아도 또렷하게 빛이 났어요. 기회 되면 아이유를 여자답게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선생과 이미자 선생의 옷을 해드렸어요. 그 위대한 분들이 ‘품위를 유지하게 해줘서 고맙다. 더 일찍 만났어야 했는데...' 치하해줘서 어찌나 송구하고 고맙던지요.
이나영은 늘 좋죠. 유행에 무심한 옷, 태평한 옷을 만드는 데 영감을 줘요. 몇 년 전 이나영, 원빈 부부가 부탁해서 밀밭 결혼식 올릴 때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해준 적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참 인성이 무리가 없고 선선해요. 무쇠솥 걸어놓고 결혼식을 올렸는데, 잔치 끝나고 원빈이 검은 봉지에 집게 들고 청소를 하더라고. 그 모습이 요만큼도 어색하지 않았어요. 사람냄새도 나고 그냥 풍경화 같았어요."
가까이 하면 닮는다고 했던가. 지춘희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여백이 고왔던 심은하도, 새초롬했던 이영애도, 때론 ‘마초’ 같던 고현정이나 진취적인 장진영, 이나영의 개구진 눈빛까지 담겨있다.
장진영이 출연한 영화 ‘청연'의 한 장면. 지춘희는 ‘그대 안의 블루(1993년)'로 대종상 의상상을 받기도 했다. |
-한때 패션연예계에 ‘지춘희 사단’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지춘희 옷을 입어야 드라마도 뜨고, 시상식에서 상도 받는다고요. 그래선지 선생 주위엔 늘 톱스타가 모여있는 것 같습니다.
"(손사레를 치며)아유, 그런 거 없어요. 연예인은 늘 무소식이 희소식이야(웃음)."
-사람을 가까이할 때 무얼 중요한 가치로 보십니까?
"진실성이요. 나는 당최 그 속을 모르겠는 사람은 불편해요. 명백한 게 좋아. 옷이든 사람이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스타일인가요?
"나는 제일 싫어하는 게 바쁜척 하는 거예요. 일하는 거 티내면서 수선 떠는 사람이 제일 안스러워. 바빠도 여유있어 보이려고 해요. 그렇게 보이는게 쉽진 않아요. 일단 정리가 잘 돼 있어야해요. 오거나이즈가 중요하죠. 수백가지 액세서리에 1mm 디테일에도 달라지는 게 패션쇼고 옷이에요. 정리가 안 돼 있으면 카오스죠. 그래서 내가 직원들에게 하는 잔소리도 늘 ‘정리해라'예요(웃음)."
나른한 말투로 여유있게 상대의 긴장을 풀어주는 지춘희 식 애티튜드의 비결은 정리정돈이었다.
"불안해서 설치는 사람을 보면 대개 자기 정리가 안 돼 있어요. 여럿이 협력해서 일하려면, 순서를 정하고, 이것 저것 조합해서 순식간에 디렉션을 내려야 해요. 평소 훈련이 돼 있으면 연결이 부드럽죠(웃음). 막힘이 없어야 즐겁잖아요."
-생각해보면 지춘희 쇼는 그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모델들과 꼭 백스테이지에서 샴페인 한 잔 을 마시고 쇼를 시작했어요.
"그랬죠. 그런데 요즘엔 쇼장에 샴페인을 못 갖고 들어가요. 냉수 한잔 마시고 하죠(웃음)."
-일하는 데 즐거움은 어느 정도 중요한 요소인가요?
"가장 중요해요. 어느 정도인가 하면 남들은 쇼하면 직전까지 디자이너가 뭘 자꾸 더하려고 한다는데, 난 쇼 끝나면 뭐 먹을까를 생각해요(웃음). 옥상에서 샴페인 따고 고기 굽는 거, 좋아해. 작은 잔치를 열어 직원들, 모델들, 고객들, 기자들 다 어울려서 감사를 나누죠. 날 더러 늘 당당한 여장부라고들 하는데, 그게 다 먹는 거, 먹이는 거, 좋아하는 기질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지춘희가 지은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밀밭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나영과 원빈. |
지춘희는 충북 충주에서 나고 자랐다. 입고, 먹는 걸 좋아했던 집안 분위기 덕에 실제 경제 능력보다 풍요하게 느끼고 살았다. 타고난 멋쟁이이였던 엄마는 소녀 지춘희에게 철마다 원피스를 지어 입혔고, 친정인 부산에서 귀한 생선을 공수해 먹었다. 중학생이 되어 서울로 오기 전까지 자연 속에서 매일이 잔칫날 같은 유년이 그에게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잘 먹고 잘 입었던' 유년의 경험이, 90년대 말 청담동 ‘살롱 문화’를 만드는데 영향을 미쳤겠네요.
"하하. 그렇죠. 나는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즐기면 좋은 동네가 된다는 믿음이 있어요. 그게 내가 하고 싶은거야.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해야 만족도가 높다잖아요? 처음 자리 잡은 곳은 명동. 27살에, 일찍 시작했죠. 친구가 신혼 여행 갈 때 입을 옷을 해달래서 만들어줬는데, 그게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진태옥, 이신우 선생님이 명동을 개척하던 시절이었죠. 그 뒤에 청담동으로 왔고, 그때의 흐름이 성수동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고요."
-어찌보면 동네에 콘텐츠를 심는 디벨로퍼 역할을 한 셈입니다.
"그런가요(웃음)... 그래도 나는 내가 직접 쓰지 않는 공간은 한번도 사본 적이 없어요. 항상 동네가 우선, 사람이 우선이었어요. 모든 일은 무리해서 억지로 하면 안돼요."
-해외 진출을 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인가요? ‘난 한국에서 인정받는 것으로 족하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해외 진출 시도를 안한 건 아니었어요(웃음). 중국 시장은 결재방법이 좀 복잡했어요. 나랑 안 맞는구나 했죠. 뉴욕은 쇼룸 정도는 무리없지만, 제대로 하려면 홍보마케팅에 투자 비용이 아주 높더라고요.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어설프게 하고 싶지는 않더라고(웃음). 실용적으로 판단해서 생각을 접었어요."
-어찌보면 일찍부터 해외로 나갔던 1세대 디자이너인 노라노, 진태옥 선생과는 좀 결이 다른 삶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개척하며 사셨어요. 나는 또 내 식대로 열심히 살았죠. 중요한 건 나는 한국 여자고, 한국 여자 몸을 내가 좀 잘 알아요. 평생을 ‘한국 여자’만 탐구했으니까. 체형의 장단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감추고 싶은 것, 보이고 싶은 것을 라인으로 잘 정리해요. 정교하면서도 재밌게요."
옷 하나를 만들 때는 밥 먹고 숨 쉴 공간까지 다 생각해서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너무 고심해서 만든 것 같은 옷도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 후, 단숨에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디자인. 그런 디자인이 자연처럼 오래간다는 생각이다.
여성스럽고 우아한 지춘희의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선 모델 장윤주. |
-선생에겐 ‘자연스러움'이 중요한 정서이자 철학인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다는 건 한편 ‘부족함을 안다' ‘자족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글쎄요. 대답이 될 지 모르겠지만 나는 옷이 너무 작품처럼 칭송받으면 좀 거북했어요(웃음). 늘 상업적인 결과물이라고 생각했죠. 살아보니 심플하게 내 직업에 충실하게 사는 게 남는 거예요. "
-그럼에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컬렉션이 있나요?
"몇 년 전에 줄자를 모티브로 했던 쇼가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1979년 ‘미스지콜렉션'을 론칭했으니, 곧 있을 2020 SS 패션쇼는 40년을 이어온 기념비적인 쇼로 볼 수도 있는데요. 특별한 감회가 있으신가요?
"40년을 해도 늘 같은 마음이야. 닥치면 늘 끙끙대요(웃음). 남이 칭찬해도 제 눈엔 모자란 것만 보이죠. 대신 쇼 끝나면 깨끗이 잊어요. 무자르듯 단칼에. 하하."
-전성기는 언제였나요?
"늘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 난 그렇게 느끼고 살았어요(웃음)."
-돌아보니 아쉬운 것은 없습니까?
"없어요. 나빴던 일은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애초에 나는 뭐가 되야지,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계획적으로 살 지도 않았죠. 그때그때 주어진 대로 만들 수 있는 옷을 내보내면서 살았어요. 꾸준하게 입지를 다져가면서. 함께 나이들어가는 후배들을 마음으로 응원해 가면서요."
2013 FW 컬렉션에 나왔던 지춘희의 줄자드레스. |
-가족에겐 어떤 사람입니까?
"엄마로서 그닥 좋지 않을 거에요. 잔소리가 많죠. 주말에도 손님 초대를 했는데 딸애한테 파스타 면이 너무 삶겼다고 잔소리를 하고 이내 후회했어. 나는 바질 3종류 다져서 토마토 소스 만들고, 고기 굽고, 민어전도 따뜻하게 잘 됐는데… 파스타가 퍼져서 막 속상하더라고(웃음).
못말리는 완벽주의자죠. 예를 들어 시장을 봐도 난 몇 군데를 가요. 손님 초대하면 메뉴 짜고 프린트해서, 빈틈없이 딱딱 움직여야 해. 꽃시장, 가락시장, 수산시장 돌고 해산물은 산지에서 시키고… 장보는 네트워크, 일하는 순서, 디저트에, 술잔, 숟가락까지 박자가 착착 맞아야 해요. 그래서 비서도 딸도, 젊은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건 많다고 해요. 하하."
-젊은이들과 늘 가까이 지내시는 비결이 있나요?
"여행이든 밥이든, 내가 누리는 건 함께 하려고 해. 식당이나 호텔에 가면 종업원에게 따로 인사하고 팁도 듬뿍 주죠.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면 세상 모든 일이 쉽게 풀려요. 오지랖도 좀 넓어요(웃음). 얼마 전엔 전국의 소시장을 돌아다니며 좋은 소를 고르는 청년을 TV에서 보고 전화했어요. 고기 좀 가져와 보랬죠. 맛을 보니 괜찮아서 내가 아는 대형 유통라인을 소개했어요.
전국적으로 판매 루트를 뚫어준 거죠. 요즘에도 우리집에 고기 댈 땐, 그 친구가 와서 꼭 인사를 해(웃음). 열심히 사는 젊은이들을 보면,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뭐라도 해주고 싶어요."
-행복하세요?
"행복해요.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게 축복이죠. 물론 뒤에선 절망도 숱하게 하지만. 하하."
40년간 블루오션으로 남은 이 도시의 골목대장. 혹 허리 굽은 할머니가 되어도 영원한 들꽃같은 ‘미스지’로 남을 우리들의 지춘희. 사진=김지호 기자 |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은 패션디자이너가 된 것, 자식을 낳은 것이라고 했다. 지춘희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사는 게 크고 원대한 사명을 이루는 게 아니라, 수시로 즐거움을 찾고 젊은 세대를 위해 소소한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를 끝내고 그녀와 서울 숲을 걸었다. 동네 사람들만 간다는 수수하고 한적한 습지를 통과해 골목길 오토바이 가게 앞에서 헤어졌다. 이웃 청년들과 서서 한담을 나누는 모습을 보니, 지춘희에게 가장 어울리는 별명은 골목대장이 아닌가 싶었다. 40년간 블루오션으로 남은 이 도시의 골목대장. 혹 허리 굽은 할머니가 되어도 영원한 들꽃같은 ‘미스지’로 남을 우리들의 지춘희.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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