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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by 조선일보

술이 좋아서! 여섯 번 이직 끝에 ‘덕업일치’ 이룬 ‘엄친딸’

[아무튼, 주말] 음주 메타버스 ‘짠’ 만든

윤선주 와이덴티티 대표

노트북 화면 안에 윤종신, 슈퍼주니어 규현, 하하, 지상렬, 유튜버 밥굽남의 얼굴이 뜬다. 저마다 손에 들고 있는 건 술! 배경 화면은 포장마차로 바뀌고, 그들 앞 테이블에는 안주가 놓이기 시작한다. 윤종신은 랍스터, 하하는 치킨, 지상렬은 감자튀김, 규현은 파전, 밥굽남은 삼겹살. 그러나 이 요리들은 전시만 할 뿐 먹을 수는 없다. 곧 출시될 음주 메타버스 ‘짠’의 플랫폼 속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와이덴티티 사무실에서 윤선주 대표가 노트북을 켜고 맥주잔을 든 채 음주 메타버스 ‘짠’으로 술을 마시고 있다. 작은 사진은 ‘짠’의 시범 버전. 지상렬, 하하, 윤종신, 규현 등이 보인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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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한자리에 모은 사람은 윤선주(45) 와이덴티티 대표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컨설턴트, SBS PD, 쿠팡 공동 창업 등을 거쳐 영국 로펌 링크레이터스 변호사와 EF 아카데미 아시아 총괄 대표를 한 ‘이직의 달인’ 윤선주 대표가 가수 윤종신과 의기투합해 스타트업에 도전했다. 음주 메타버스 ‘짠(jjaann.co.kr)’이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딸이자 이수성 전 국무총리의 조카로 ‘금수저’일 수밖에 없는 그녀는 어쩌다 ‘술’에 빠진 걸까. 대원외고·서울대·하버드를 나와 화려한 직장을 옮겨 다니고도, 생애 처음 ‘덕업일치’를 이뤘다는 윤씨를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술 마시는 메타버스 ‘짠’

-음주 메타버스라니?


“난 술을 사랑한다. 술보다 술자리를 더 사랑한다. 사람들이 터놓고 진솔하게 대화하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대학교 때나 SBS ‘야심만만’ PD 할 때 ‘이번주 금요일에 술 마실 사람 모여’ 하면 25명씩 모였다. 그런데 40대가 되니 에너지도, 시간도 없더라. 다들 결혼도 했고, 애들도 키워야 하고. 코로나까지 겹쳐 우울감 드는 사람들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아 인터넷으로 함께 만나 술을 마시는 메타버스 플랫폼을 만들게 됐다.”


-이미 줌으로 모여서 술 마시지 않나?


“인터넷으로 술 마셔 봤나. 의외로 재미없다는 사람 많다.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예능 PD를 할 때도 사람에게 100% 의존하는 방송을 만들면 시청률은 들쭉날쭉하다. 대신 같이 요리한다든가, 정글에 떨어뜨려 놓는다든가 하는 틀이 있으면 어느 정도 재미가 보장된다. 즉, 줌으로 술을 마시는 건 기술적인 연결만 해주는 것이다. ‘짠’은 그 안에 음악, 게임, 노래방 등 재미 요소를 담은 것이다.”


-윤종신과는 어떻게 만났나.


“SBS에서 일할 때 출연자와 PD로 만났다. 대원외고 선배이기도 해서, 이런저런 술자리에서 친해졌다. 이 아이템으로 사업을 해야겠다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윤 선배다. 플랫폼 이름 ‘짠’도 선배가 지어줬다. 한국어이면서, 외국인들도 발음하기 쉬운 단어다.”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둔 건가.


“내 최종 목표는 K드링킹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다. 하버드에서 유학할 때 내가 ‘소폭(소주와 맥주를 섞은 술) 타기 도미노’ 등을 보여주면 다들 엄지를 치켜들었다. 옆 테이블에서도 재밌다며 달려왔다. 그들의 술 문화는 ‘나는 맥주, 너는 진토닉’ 이런 식으로 각자 마시는 문화다. 그러나 우리는 같이 게임을 하면서 같이 마시는 문화다. 술 문화와 함께 한국 전통주나 소주 등도 해외에 알리고 싶다.”


-고객층이 넓진 않을 것 같은데.


“애주가로 시작해, 술 못 마시는 사람, 오프라인 등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술 못 마시는 사람들을 위해선 포도주스, 사이다 등의 아이템을 만들고 있다. 대화하다 친구에게 치킨을 선물하면 진짜로 치킨 배달이 가는 시스템도 개발 중이다. 메타버스 공간에서 사용된 화폐는 미국 보스턴의 어느 바에서 실제로 사용될 수 있도록 개발 중이다. 슈퍼주니어 규현, 지상렬, 하하 등 좋아하는 연예인과 대화도 나누고, 육아에 지친 부모들을 위해 오은영 박사도 출연해 대화하는 코너도 만든다. 각자 좋아하는 드라마나 반려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방도 만들고. 어떻게 보면 하이텔, 나우누리 등 PC통신 감성이다.”

여섯 번 이직

-첫 직장은?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다. 그곳에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직원들을 구조조정해야 했는데, 그런 일이 싫어 6개월 만에 그만뒀다. 그러고 SBS PD로 입사했다. ‘여명의 눈동자’ 같은 드라마를 만들어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인사팀장이었던 허인구 현 G1방송 대표가 ‘드라마는 외골수여야 하는데, 너처럼 여러 가지에 관심 많은 사람은 예능이 더 잘 맞겠다’고 해 예능 PD가 됐다.”


-그런데 또 5년 만에 나왔다.


“난 직접 경험을 통해 내 길을 찾아가는 스타일이다. 옷도 직접 입어보고 사는 것처럼 직업도 직접 경험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BCG에 있을 때 난 돈에만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고, SBS에 있을 때 난 재미만 추구하는 성향은 아니라 느꼈다. UN에서 일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 하버드 로스쿨과 케네디스쿨에 진학했다.”


-쿠팡 창업엔 어떻게 관여했나.


“김범석 의장과는 학부생 때부터 알았다. 서울대 다닐 때 방문학생 프로그램으로 하버드를 갔는데, 그때 김 의장이 학부생이었다. 내가 로스쿨을 다닐 때는 김 의장이 비즈니스스쿨에 있었다. 김 의장이 ‘그루폰 모델로 한국 가서 사업할 거다’라고 하길래 이것저것 아이디어를 던져줬다. 그랬더니 어느 날 같이하자고 하더라. 창업 초반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깐 새벽 3~4시까지 진짜 열심히 했다. 그런데 정작 일을 하다 보니 김 의장과 방향이 잘 맞지 않았다. 대학원 학자금 융자도 갚아야 해서 홍콩으로 변호사를 하러 떠났다. 거기서 EF아카데미 제안을 받았고, 한국 지사에 입사했다.”


-EF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10년을 일했다.


“EF는 어학연수 등을 도와주는 글로벌 사설 교육 기업이다. 영어를 기본으로 독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캠퍼스 등이 있다. EF 다닌 지 2년 차에 ‘한국어 캠퍼스’를 내자고 제안했다. 처음 회사 대표는 거절했다. 당시 회사 방침은 전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늘리고, 제2 외국어 캠퍼스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계속 주장했다. ‘우리말이 얼마나 우수한지 아느냐. 영어로 달다는 스위트, 슈걸리 정도밖에 없지만, 한글은 달콤하다, 달달하다, 달다 등 정말 많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한류가 급성장하고 평창올림픽도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한국어 캠퍼스가 만들어졌다. 현재 EF 내에서 한국어는 영어 다음으로 큰 캠퍼스다.”


-잦은 이직이 인생에 도움이 될까.


“처음 아버지는 ‘너무 전문성이 없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셨다. 그런데 또 이렇게 갈지(之)자로 살다 보니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전문성이 생기더라. ‘짠’도 내가 만들어온 발자국으로 만든 것이다. 쿠팡 경험을 살려 짠을 창업했고, 예능 PD 경험으로 연예인들 출연하는 셀럽 버전을 만들었다. 회사 운영은 EF에서 일했던 경험을 많이 참고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게

-금수저라서 가능한 삶 같다.


“사람들이 나보고 금수저라고 하는 건 장관 딸이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아버지가 장관이었던 시절은 2년 정도다. 그 기간 덕을 본 것도 없다. 아빠는 휴가도 없을 정도로 바빴다. 어릴 때부터 ‘절대 공무원이랑은 결혼 안 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공무원과 결혼했다.(윤 대표는 2015년 열 살 연하의 외교관과 결혼했다)


“내가 결혼에 대해 내려놨던 시점에 남편이 왔다. 외무고시를 막 통과하고 입부한 외교관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러 갔다가 만났다. 남편이 ‘내 꿈 중 하나는 똑똑한 와이프 외조하기’라고 하더라. 하하!”


-‘엄친딸’이다.


“부모님께 받은 게 많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누구 딸, 누구 조카로 불리는 것이 속상했다. 윤선주라는 이름 석 자로 우뚝 서고 싶어서 더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특히, 오빠가 대학교 때 스스로 세상을 떠난 후로 부모님은 ‘건강하게 살아만 있어다오’가 나에 대한 유일한 바람이었다.”


-왜 세상을.


“이유는 모른다. 오빠야말로 경기고 학생회장을 거쳐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던 엄친아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오빠는 가끔 힘들어했는데, 그 힘듦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했다. 오빠가 떠난 뒤 너무 힘들었다. 내게 오빠는 정신적 지주였고, 롤모델이자, 베스트프렌드였다..”


-어떻게 극복했나.


“한번은 대학교 때 2주 동안 학교도 안 가고 집에만 있었다. 그때 부모님은 아버지 직장 때문에 필리핀에서 사셨다. 이대로 집에 혼자 계속 있다가는 죽을 것 같더라. 안 되겠다 싶어 무조건 밖으로 나가 전국을 다녔다. 새벽 4시에 계룡산도 올라가고, 통영에서는 통통배를 얻어 타고 바다로 나갔다. 그렇게 전국을 돌며 사람들에게 기운을 받고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느꼈다. ‘난 사람들과 맞닿음을 통해 우울감을 극복하는 사람이구나. 나 같은 사람들을 돕고 싶다.’ 짠을 만든 것도 결국은 사람이 사람을 통해 위로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혜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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