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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조선일보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11] 다 가졌지만 외로웠다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신데렐라에서 비극의 주인공으로… 오스트리아가 사랑하는 ‘세기의 미인’ 황후 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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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런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분이 황제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머니로부터 황제이자 이종사촌인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1830~1916)와 결혼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시씨(Sissi)는 진정으로 기뻐했다. 너무나 잘생기고 친절한 청년 아닌가? 다만 본능적으로 그녀는 두려웠다. 그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라는 사실이. 그러나 왕관의 무게를 느끼기에는 너무 어렸다. 시씨는 막 열여섯 살이 된 소녀에 불과했다. 원래 황제의 배필로 내정된 사람은 친언니 헬레네였다.


황제와 헬레네는 1853년 8월 황실 휴양지인 바트 이슐에서 만나 약혼할 예정이었다. 정확하게는 황제의 어머니인 조피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헬레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여동생 시씨를 동행시키면서 모든 일이 엉클어졌다. 황제가 첫눈에 시씨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황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결정에 반항하며 시씨와 결혼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조피는 당황했으나 시씨도 자신의 조카딸이니 황제가 원하는 결혼을 시켜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만난 지 3일 만에 약혼했고, 결혼식은 다음 해인 1854년 4월 24일로 잡혔다.


고향으로 돌아온 시씨는 남은 9개월 동안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로서 갖춰야 할 기본 소양과 궁정 예법을 익혀야 했다. 자유롭게 자란 시씨에게 예비 황후 교육은 힘겨웠다. 그녀는 어렴풋이 '불행'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그러나 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랑하는 연인을 생각하며 애써 그 단어를 지웠다. 그녀는 황제의 사랑을 굳게 믿었다.


빈이 자랑하는 '세기의 美人'


빈은 문화와 예술, 역사를 파는 도시다. 에너지 음료 레드불과 크리스털 전문 기업 스와로브스키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떠오르는 세계적 브랜드가 없는 오스트리아가 여전히 부자인 이유다. 그런 만큼 빈의 콘텐츠 파워는 상상을 초월한다. 음악으로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슈트라우스 부자(父子)가 있다. 비발디, 말러, 쇤베르크, 카라얀 등은 시대를 초월하는 대가(大家)이지만 이 도시에선 명함 내밀기가 망설여진다. 미술로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오스카어 코코슈카가 있고, 건축으로는 오토 바그너와 아돌프 로스가 있다. 정신의학의 아버지 프로이트, 대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작가 호프만슈탈과 츠바이크도 빈의 자식들이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600년 수도였으니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명단은 끝이 없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뜻밖의 인물, 바로 시씨라는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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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증거가 호프부르크(Hofburg)에 자리 잡고 있는 그녀만을 위한 박물관이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궁(本宮)이다. 조선왕조의 경복궁인 셈이다. 시씨는 황후였다. 제국의 주인인 황제도 아니고, 합스부르크 왕조 출신도 아니었다. 그런 그녀만을 위한 박물관이 호프부르크에 있는 것이다. 그 어떤 황제도, 심지어 마리아 테레지아조차도 누리지 못하는 영광이다. 도대체 왜? 그녀의 인생이 갖는 비극적인 마력(魔力) 때문이다.


링 슈트라세를 사이에 두고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과 마주 보고 있는 영웅광장과 맞닿아 있는 거대한 건축군(群)이 호프부르크다. 방의 수만 2600개에 이른다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중심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너른 중정(中庭)이 나온다. 한가운데 로마 황제를 흉내 낸 오스트리아 프란츠 1세 황제의 거대한 동상이 서 있다. 궁과 바깥을 연결하는 문들의 좌우에는 그리스신화의 가장 인기 있는 주인공, 헤라클레스의 업적을 나타내는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시씨 박물관은 바로 이곳에 위치해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사람들은 그녀에게 빠져든다.


어긋난 황제의 사랑과 황후의 自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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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요제프 황제(위 사진)와 시씨 박물관.

'시씨'라는 애칭으로 더욱 잘 알려진 그녀의 본명은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Elisabeth von Wittelsbach·1837~ 1898)다.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였던 뮌헨에서 비텔스바흐 왕가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왕가의 방계였던 탓에 시시는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포센호펜성(城)에서 자유롭게 자랐다. 그녀의 운명은 언니를 따라갔다 만난 사랑 때문에 뒤바뀌었다. 사랑이란 마법에 사로잡힌 그녀는 황제 한 사람만을 믿고 자유로운 일상과 사랑하는 가족을 포기했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어린 소녀를 낯설고 엄격한 빈으로 데려왔으면서 정작 그녀에게 '사랑'을 보여주지 못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새벽에 일어나 잠드는 시간까지 국사(國事)에 매달려야 했다. 제국은 넓고 할 일은 많았으며, 성실한 황제는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그녀는 비정한 궁정 사회에 홀로 남겨졌다. 감수성 예민한 소녀는 자신을 향한 궁정 귀족들의 멸시와 질투를 온몸으로 느꼈다. 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대귀족들에게 그녀는 바이에른에서 온 촌뜨기, 자신들의 우상인 황제를 앗아간 연적(戀敵)에 불과했다. 이모이자 시어머니인 조피의 간섭은 둘의 결혼 생활을 더 힘들게 했다. 조피는 손주들을 데려다 자신이 직접 길렀고, 시씨가 아이들을 만나는 것조차 허락을 받도록 했다. 빈은 그녀에게 창살 없는 감옥이 되어 갔다.


死後에도 누리지 못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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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는 빈에서 외로운 이방인이었다. 마음의 상처는 서서히 육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는 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침이 나고 몸이 아팠다. 얼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눈빛은 생기를 잃었다. 그녀는 건강 회복을 이유로 여행을 떠났고, 황제는 마지못해 황후의 여행에 동의했다. 시씨는 포르투갈에서 지중해의 코르푸섬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을 여행했다. 1889년 1월 30일 아침, 시씨에게 외아들이자 제위(帝位) 계승자인 루돌프가 빈 근교 마이어링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머니를 닮아 열정적이고 자유주의자였던 루돌프는 궁정의 억압적 분위기와 완고하게 변화를 거부하는 아버지와의 불화를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제 황후는 검은 상복을 입고 유럽을 떠돌았다. 마치 유령처럼. 그렇게 방랑하기를 십 년. 1898년 9월 10일, 시씨는 스위스 제네바의 호숫가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의 칼에 맞아 숨졌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처구니없고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자신을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살인자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마리 발레리 공주)는 측면에서 보면 시씨의 죽음은 자살에 가까웠다. 황후의 살해 소식을 들은 황제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세상은 알지 못할 거야." 측근이 들었다는 이 황제의 독백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다만 황제가 줄 수 있는 사랑과 황후가 꿈꾸던 자유가 같은 계절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했을 뿐이다. 각자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와 행복이 달랐기 때문에.


시씨는 생전에 그러했듯이 사후(死後)에도 빈을 떠나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이 여행했던 곳 중 가장 아름다웠던 그리스의 코르푸섬을 마지막 안식처로 정했다. 자유는 사후에도 주어지지 않았다. 황실은 그녀를 빈 황실 전용 묘에 안치했다. 그녀에게 합스부르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족쇄였던 것이다.


시씨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장소는 호프부르크지만, 그녀를 추억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장소는 빈 시민공원 후미진 곳에 있다. 그곳에는 시씨의 기념 동상 하나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다. 동상은 사진 속 그녀처럼 단아하고 고요하다. 이곳에선 볕이 들면 화단의 꽃이 만발하고, 볕이 지면 그녀의 고독이 피어오른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권력일 수도, 재산일 수도, 명예일 수도,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시씨는 그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행복한 적이 없었다.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빈에 올 때마다 이곳을 들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유의 가치를 되새긴다. 시씨가 직접 지은 시(詩)의 한 구절과 함께.


'그리고 하릴없이 이 거래를 저주하고 있다. 자유를 맞바꾼 이 거래! 자유, 너를 잃어버린.'


시씨의 헝가리 사랑… 동병상련? 백작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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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민족지도자 줄러 언드라시.

시씨의 헝가리 사랑은 유명했다. 이유는 뭘까? 자유를 사랑하고 기질이 억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헝가리의 처지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헝가리의 말과 역사를 배웠고 헝가리 자유주의자들과 교류했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 헝가리의 민족지도자인 줄러 언드라시(Gyula Andrassy · 1823~1890) 백작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워낙 친밀해서 온갖 루머가 떠돌았다. 정말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을까?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다. 어쨌든 시씨는 남편인 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수립에 기여했고, 언드라시는 헝가리 왕국의 총리대신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무대신을 오랫동안 지냈다.


[빈=송동훈 문명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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