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의 나라? 이곳을 빼고 ‘오렌지 군단’을 논할 순 없다
2019년 챔피언스리그 우승 뒤 트로피에 입을 맞추는 버질 판 다이크. 수리남계 선수인 그는 네덜란드 주장으로 2022 카타르월드컵에 출격한다. / 트위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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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에 유독 자주 오르내리는 나라가 있습니다. 브라질 북쪽에 있는 인구 60만의 작은 나라 수리남(Suriname)입니다.
바로 하정우·황정민이 주연한 넷플릭스 6부작 ‘수리남’ 때문인데요. 배우들의 호연과 몰입감 넘치는 내용으로 큰 사랑을 받으면서 수리남에 대한 인지도가 확 올라갔습니다. 물론 수리남 정부에서 “우리는 ‘마약 국가’가 아니다”라며 항의하기도 했지만요.
어쨌든 넷플릭스 시리즈가 나오기 전까지 많은 한국 사람들은 수리남이란 나라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하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수리남의 존재에 대해 아는 분들이 많았죠.
네덜란드 식민지였다가 1975년 독립한 수리남에서 수많은 수퍼스타가 배출됐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 ‘오렌지 군단’을 논할 때 수리남을 빼놓고 이야기해선 곤란합니다. 수리남에서 태어났거나 수리남 혈통의 수많은 선수가 네덜란드와 유럽 빅리그 클럽 유니폼을 입고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정작 수리남은 국제 축구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수리남은 남미에 자리 잡고 있지만 북중미카리브해축구연맹(CONCACAF)에 속해 있습니다. 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선 적은 한 번도 없고, 북중미 최강자를 가리는 골드컵에선 1977년 6위를 한 것이 최고 성적입니다.
그럼 세계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은 수리남 혈통의 축구 스타들을 알아볼까요.
치렁치렁한 레게 머리가 인상적인 루드 굴리트는 네덜란드의 유로 1988 우승을 이끈 만능 플레이어였다. / 트위터 |
◇ 진정한 ‘육각형 플레이어’ 굴리트
올드 팬들에겐 마르코 판 바스턴,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네덜란드 대표팀, AC밀란(이탈리아)의 ‘오렌지 3총사’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현역 시절 치렁치렁한 레게 머리를 휘날리며 80년대를 풍미했죠. 네덜란드 발음으로는 뤼트 휠릿인데 여기선 우리에게 익숙한 굴리트라 하겠습니다.
어느덧 예순이 된 굴리트는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수리남인이었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인이었죠. 재미있는 건 굴리트의 아버지 조지가 수리남에서 네덜란드로 와서 정착할 때 함께 온 이가 헤르만 레이카르트란 사실입니다.
바로 뒤에 소개할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아버지죠. 수리남 출신 두 아버지의 네덜란드행이 낳은 결실이 ‘오렌지 3총사’ 중 굴리트와 레이카르트라니 그야말로 영화 같은 스토리입니다.
1987년 발롱도르 수상자인 굴리트는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만능 플레이어였습니다.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지만, 때론 스트라이커로 골 사냥에 나서기도 하고, 때론 중앙 미드필더로 중원을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한때는 밀란의 굴리트와 나폴리의 디에고 마라도나가 세리에A에서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그리던 시절도 있었죠. 굴리트는 전성기 때는 스피드와 패스, 드리블, 헤더, 수비 능력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진정한 ‘육각형 플레이어’였습니다.
네덜란드와 AC밀란에서 맹활약했던 오렌지 3총사. 왼쪽부터 굴리트, 판 바스턴, 레이카르트 / 페이스북 |
굴리트는 에인트호번과 AC밀란, 삼프도리아, 첼시 등에서 뛰었는데 AC밀란 시절이 가장 찬란했습니다. 세리에A 3회 우승을 일궜고, 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에서 1989년과 1990년 2연패(連覇)를 달성했죠.
루마니아의 슈테아우아 부쿠레슈티와 맞붙은 1989년 결승에선 두 골을 터뜨려 4대0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이듬해에도 벤피카(포르투갈)와 결승에서 풀타임을 소화하며 우승의 감격을 누렸죠.
네덜란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는 주장 완장을 차고 유로 1988 정상에 올랐습니다.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가 월드컵과 유로를 통틀어 유일하게 메이저 대회를 제패한 기록입니다.
유로 1988의 굴리트는 1974년 서독 월드컵 준우승 당시 ‘토털 풋볼’로 네덜란드를 이끈 요한 크루이프가 생각날 정도로 공·수에서 완벽하게 팀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소련과 결승에서 전반 32분 헤딩 골로 선제 득점을 올리며 2대0 승리의 주역이 됐습니다.
굴리트는 현역 마지막 시절 첼시에서 감독 겸 선수로 뛰었는데 1997년 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지도자 경력은 초라했습니다.
뉴캐슬과 페예노르트 등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습니다. ‘좋은 선수가 좋은 감독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축구계의 진리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 인물입니다.
'뭉쳐야 찬다'에서 만난 안정환과 굴리트. / 유튜브 |
굴리트는 최근 한국을 방문해 축구 예능프로그램인 ‘뭉쳐야 찬다’에 출연했습니다. 굴리트가 ‘롤 모델’이었던 안정환 감독은 설레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죠. 굴리트와 악수를 나누며 “유어 마이 히어로”라며 존경을 표한 안정환 감독은 “당신의 아름다운 축구 덕분에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레이카르트는 현역 시절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꼽혔다. / IFFHS |
◇ 수비형 미드필더의 교과서 레이카르트
굴리트와 60세 동갑내기인 레이카르트는 앞서 설명했듯 ‘오렌지 3총사’로 유명한 선수입니다. 수리남 축구 선수였던 헤르만이 네덜란드에 정착해 네덜란드인 아내를 만나 낳은 아들이 레이카르트입니다. 굴리트와 마찬가지로 고향은 암스테르담이죠.
레이카르트는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란 평가를 받은 선수였습니다. 190cm의 큰 키에 엄청난 활동량을 보유했던 그는 아리고 사키 감독이 이끈 AC밀란 압박 축구의 중심이었죠.
무시무시한 압박을 바탕으로 공을 뺏어낸 뒤 유려한 움직임으로 공격으로 연결하는 플레이가 탁월했습니다. AC밀란과 네덜란드는 굴리트가 공격형, 레이카르트가 수비형으로 미드필드를 장악하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습니다.
1988년과 1989년 발롱도르에서 3위를 차지한 그는 굴리트, 판 바스턴과 함께 AC밀란에서 두 번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일궈냈습니다. 특히 1990년 벤피카와 결승전에선 결승골을 터뜨리며 1대0 승리를 이끌죠.
1993년 네덜란드 아약스로 유니폼을 바꿔 입은 레이카르트는 에드가 다비즈, 마르크 오베르마스, 클라렌스 세도로프 등 유망주들이 즐비했던 팀의 중심을 베테랑으로 잘 잡아줬습니다. 1995년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올라 풀타임을 뛰며 친정팀 AC밀란을 꺾는 데 큰 공헌을 했죠. 그의 세 번째 챔피언스리그(전신 유러피언컵 포함) 우승 트로피였습니다.
레이카르트는 네덜란드 대표로도 13년간 뛰었습니다. 유로 1988에서도 우승 주역으로 활약하며 굴리트, 판 바스턴 등과 함께 대회 베스트11에 선정됐습니다.
레이카르트가 바르셀로나의 지휘봉을 잡았던 시절 리오넬 메시의 신화가 시작됐다. / IFFHS |
레이카르트의 지도자 경력은 친구인 굴리트보다 훌륭합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아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네덜란드 대표팀 코치로 일한 그는 유로 2000에서 오렌지 군단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4강에서 탈락합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화려한 공격력을 선보이며 국내 팬들도 많았는데, 결승 진출 실패에 많이들 아쉬워했었죠.
레이카르트는 ‘전설’ 요한 크루이프의 추천으로 2003년부터 FC바르셀로나 사령탑을 맡았습니다. 스페인 라 리가 2회 우승(2005·2006)과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2006)을 이끌며 눈에 띄는 성과를 남겼습니다. 이후 펩 과르디올라가 세운 바르셀로나 왕조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죠.
'고글맨' 다비즈는 중원에서 왕성한 활동량을 자랑했다. / 유벤투스 홈페이지 |
◇ 고글 쓴 싸움닭 다비즈
우리에겐 고글을 쓴 모습으로 익숙한 선수입니다. 드라마 ‘수리남’의 주요 배경인 수도 파라마리보에서 태어났습니다. 수리남과 유대인 혈통이었던 다비즈(49)는 어릴 때 가족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네덜란드인이 됐습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고글은 FIFA(국제축구연맹)가 특별히 허용해줘 쓸 수 있었습니다. 왼쪽 눈에 녹내장이 생겨 실명 위기까지 몰렸던 그는 수술을 잘 받아 다행히 회복했고, 눈을 보호하기 위해 고글을 쓰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다비즈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투지’입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미친 듯한 활동량을 선보이며 그라운드 곳곳을 커버하는 모습으로 국내 팬들로부터 ‘싸움닭’이란 별명도 얻었습니다. 그의 스승이었던 루이스 판 할 감독은 그를 투견으로 유명한 ‘핏불’이라 불렀죠.
하지만 투박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유연한 드리블과 강력한 킥으로 공격적인 재능도 드러냈습니다.
22세였던 1995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풀타임을 소화하며 아약스 우승에 큰 힘을 보탰습니다. 아약스에서 에레디비지에 우승 3회, 유벤투스에서 세리에A 우승 3회란 성과를 남겼습니다.
은퇴 후 지도자로 눈에 띄는 업적을 쌓진 못했습니다. 이번 카타르월드컵에는 판 할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 나갈 예정입니다.
클라위버르트는 유로 2000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한때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였다. / 트위터 |
◇ 유로2000 득점왕 클라위버르트
우리에겐 클루이베르트란 이름으로 친숙한 스트라이커입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맹활약한 네덜란드 스타 뤼트 판 니스텔로이와는 같은 1976년 7월 1일생입니다.
둘은 한때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주전 경쟁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클라위버르트가 20대 초중반, 판 니스텔로이가 중반 이후에 두각을 나타내며 전성기가 겹치진 않았습니다.
클라위버르트 역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는데 수리남 출신 축구 선수가 아버지였습니다. 어머니는 네덜란드령 퀴라소 출신이고요.
인구 16만명의 퀴라소는 야구가 강한 나라입니다. 앤드류 존스, 안드렐톤 시몬스, 켄리 잰슨, 아지 알비스, 주릭슨 프로파 등 수많은 메이저리거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죠.
클라위버르트는 아약스를 거쳐 바르셀로나에서 1999-2000시즌부터 4시즌 연속 20골 이상을 터뜨리며 이름을 날렸습니다. ‘오렌지 군단’으로는 유로 2000에서 5골을 터뜨리며 공동 득점왕에 오릅니다.
유로 2000의 네덜란드는 지금도 올드 팬들이 추억하곤 하는 화려한 멤버였습니다. 클라위버르트와 데니스 베르캄프가 공격 선봉에 나섰고, 양 사이드에선 발 빠른 마르크 오베르마스와 부데베인 젠덴이 무시무시한 돌파를 선보였습니다.
중원엔 에드가 다비즈와 필립 코쿠가 버티고 있었죠. 프랑크 드 보어와 야프 스탐이 중앙 수비를 책임졌고요. 골문은 에드윈 판 데르 사르가 지켰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4강에서 승부차기 끝에 이탈리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전성기 시절 188cm의 큰 체격을 바탕으로 타깃맨으로 뛰어난 능력을 선보인 클라위버르트는 유로 2000을 정점으로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20대 후반부터 뉴캐슬과 발렌시아, 에인트호번 등 여러 팀을 전전했지만, 불성실한 훈련 태도 등으로 인해 옛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32살인 2008년에 릴을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습니다.
그는 지도자로도 큰 성과는 남기지 못했습니다.
세도로프는 서로 다른 3팀에서 주전으로 빅이어를 들었다. / 트위터 |
◇ 3팀에서 챔스 우승한 세도로프
세도로프(46)도 다비즈와 마찬가지로 수리남 수도 파라마리보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살 때 가족과 함께 일찌감치 네덜란드로 건너와 살았죠.
세도로프는 축구 역사상 최초로 서로 다른 세 클럽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든 선수입니다. 1994-1995시즌 아약스, 1997-1998시즌 레알 마드리드, 2002-2003시즌과 2006-2007시즌 AC밀란에서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섰습니다. 세도로프는 네 번의 결승에 모두 선발로 출전해 팀 우승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는 뛰어난 전술 이해도를 바탕으로 미드필더 전 포지션을 소화했습니다. 전성기 시절엔 슈팅과 패스, 드리블, 수비 능력까지 모두 갖춰 팀에 꼭 필요한 선수라 평가받았죠. 다만 앞서 소개한 선수들에 비해 네덜란드 대표팀으로 보여준 성과는 미미한 편입니다.
세도로프는 2014년 1월 현역 은퇴와 함께 친정팀 AC밀란 지휘봉을 잡게 됩니다. 당시 구단주였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가 꼬드겨 팀 역사상 첫 흑인 감독이 됐지만, 성적 부진으로 6개월 만에 지휘봉을 필리포 인자기에게 넘겨줍니다. 전반기 11위였던 팀을 8위까지 끌어올렸지만, 팀 수뇌부를 만족시키진 못한 거죠. 그는 2019년 카메룬 대표팀을 끝으로 지휘봉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버질 판 다이크는 세계 최고 센터백으로 꼽힌다. /조선일보DB |
◇ 세계 최고의 센터백 판 다이크
리버풀 소속으로 세계 최고의 중앙 수비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선수입니다. 네덜란드 입장에선 다소 오랜만에 나온 수리남계 빅스타죠. 많은 선수들이 아버지가 수리남계인 것과 달리 판 다이크(31)는 어머니가 중국계 수리남인이었습니다. 판 다이크의 얼굴에 동양적인 면이 보이는 이유죠.
판 다이크는 흐로닝언과 셀틱, 사우스햄턴 등을 거쳐 2018년 리버풀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위르겐 클럽 감독의 신뢰 속에 맹활약하며 수비가 약하다고 평가됐던 리버풀의 희망으로 떠오릅니다.
193cm의 큰 체격을 자랑하는 그는 무시무시한 스피드를 자랑합니다. 2019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주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손흥민이 가속력을 붙여 돌파를 시도하자 곧바로 따라잡아 막아낸 장면이 떠오르네요.
두뇌 회전도 빨라 공의 낙하지점을 미리 파악하는 등 영리한 위치 선정으로 상대 공격을 차단하죠. 킥력을 앞세운 패스 능력도 뛰어납니다.
어쩌면 나폴리의 김민재가 도달해야 하는 이상향 같은 선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클롭 감독은 “그의 장점에 대해 쓰려면 책 한 권은 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판 다이크는 2018년부터 3년 연속 UEFA 올해의 팀(베스트11)에 뽑혔습니다. 가장 절정의 순간은 2018-2019시즌이었죠.
리버풀을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올려놓으면서 UEFA 올해의 선수와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선수, PFA(영국프로축구선수협회) 올해의 선수상을 휩쓸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2019년 FIFA 올해의 선수와 발롱도르에선 리오넬 메시에 밀려 2위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는 2015년부터 네덜란드 대표로 뛰고 있습니다. 클럽에서 화려한 경력과 달리 대표팀에선 이렇다 할 장면이 없습니다. 유로 2016과 2018 러시아월드컵에선 네덜란드가 본선 진출에 실패하며 큰 무대에 설 기회를 놓쳤고, 유로 2020엔 자신이 부상을 당하며 나서지 못했죠.
2022 카타르월드컵은 판 다이크가 ‘오렌지 군단’의 일원으로 진면목을 보여줄 좋은 기회입니다. 네덜란드는 개최국 카타르, 세네갈, 에콰도르와 함께 A조에 속해 있습니다.
세네갈과 맞붙는 조별리그 1차전에서 판 다이크가 리버풀 옛 동료 사디오 마네(바이에른 뮌헨)를 잘 막아낼 지가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입니다. 판 다이크의 네덜란드는 상대적으로 쉬운 조에 편성이 되면서 16강 이후를 더욱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19년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골을 터뜨린 뒤 포효하는 베이날둠. / 유튜브 |
◇ 수리남의 유일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네스티
그 밖에도 현재 유럽 빅리그에서 뛰는 선수 중엔 조르지니오 베이날둠(32·로마), 스티븐 베르흐베인(25·아약스) 등이 수리남 혈통의 선수들입니다. 리버풀 유니폼을 입고 2018-2019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주역으로 활약한 미드필더 베이날둠은 올 시즌엔 로마에서 뛰고 있습니다.
베이날둠은 특히 2018-2019시즌 바르셀로나와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활약상으로 기억되죠. 1차전에 0대3으로 패한 뒤 2차전에서 4대0 대승으로 짜릿한 결승 진출을 이뤄낼 당시 2차전에 교체로 들어와 두 골을 터뜨린 장면이 세계 축구사에 길이 남게 됐습니다.
국내 팬들에겐 ‘베르바인’이란 이름으로 친숙한 베르흐베인은 손흥민의 팀 동료로 낯익은 선수입니다. 토트넘에서 세 시즌을 뛰었지만, 손흥민에게 밀려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참, 리즈와 첼시에서 각각 한 번씩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50)도 수리남계 스타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많은 선수가 그렇듯 수리남에서 태어났지만 가족이 네덜란드로 이민을 왔습니다.
2012년 행사장의 거스 히딩크 감독과 여자친구 엘리자베스. / 조선일보DB |
또 한 명, 축구계 관련 인물 중에 유명한 수리남 출신 여성이 있습니다. 바로 거스 히딩크 전 한국 대표팀 감독의 20세 연하 여자친구인 엘리자베스 피나스입니다. 2002 한·일월드컵을 통해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얼굴이 된 엘리자베스는 최근 히딩크 감독의 방한 때도 함께해 오랜 사랑을 과시했습니다.
입식 격투기 K-1에서 3차례 챔피언을 지낸 레미 본야스키. / 페이스북 |
서울올림픽 당시 남자 수영 접영 100m에서 깜짝 금메달을 따낸 안토니 네스티(손을 든 선수). 뒤가 세계 최강자였지만 이변의 희생양이 된 은메달리스트 매트 비욘디. /조선일보DB |
1988 서울올림픽을 기억하는 분이라면 안토니 네스티(55)를 떠올릴 수 있을까요? 네스티는 네덜란드가 아닌 수리남 국가대표로 세계 정상에 선 인물입니다. 이번에 소개할 마지막 수리남 스타입니다.
오히려 네스티는 지금의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태어나 수리남으로 이주한 경우입니다. 그는 서울올림픽 수영 남자 접영 100m 결선에서 금메달을 예약해 놓은 것처럼 보였던 최강자 매트 비욘디를 0.1초 차로 꺾으며 세계 수영 역사상 최대 이변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그의 53.00은 올림픽 신기록이었죠.
하지만 그는 결코 운으로 메달을 딴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4년 뒤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선 같은 종목 동메달을 목에 걸었죠. 그가 따낸 두 개의 메달은 수리남이 올림픽에서 수확한 메달의 전부입니다.
수리남의 수영 전설 네스티는 현재 미국 남자 수영 대표팀의 코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미국수영코치협회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코치’에 뽑힐 만큼 능력도 인정받았고요.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1988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낼 당시 수리남인들은 나와 조국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런 순간을 우리 국민들에게 선사할 수 있어 뿌듯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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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