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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는 88올림픽, 김대중은 남북정상회담… 靑 나무엔 현대사가 있다

[나무박사 박상진이 들려주는 청와대의 대통령 나무] [下]

노태우는 88올림픽, 김대중은 남북정상회담… 靑 나무엔 현대사가 있다

최규하 대통령이 1980년 4월 11일에 기념식수한 독일가문비나무. 헬기장과 녹지원 사이에 있다. /눌와

역대 대통령들이 청와대에 심은 나무를 보면 각자의 개성과 취향, 식수를 하던 당시 상황이 드러난다. 청와대 경내의 나무를 조사한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기념식수가 없는 윤보선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역대 대통령 11명이 심은 나무가 청와대 곳곳에 살고 있다”며 “1980년대 이후 대통령들은 주목, 계수나무 등 보기 좋은 정원수와 아울러 상징성을 가진 나무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조선일보

그래픽=김성규

노태우는 88올림픽, 김대중은 남북정상회담… 靑 나무엔 현대사가 있다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상춘재 앞의 백송. 아직 껍질이 검푸른 빛이다. /눌와

춘추관 쪽 잔디밭과 녹지원 사이의 작은 숲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이 1980년 4월 기념식수한 독일가문비나무가 자라고 있다. 박 교수는 “독일가문비나무는 곧은 줄기가 아름답고 햇빛이 약해도 광합성을 하기 때문에 잘 버티지만, 잔가지가 흔히 아래로 처지는 경향이 있어 최 전 대통령이 5공 세력의 압박에 금방 굴복한 것과 비유하기도 한다”고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3년 식목일 수궁터와 상춘재 앞에 백송을 한 그루씩 심었다. 수궁터 백송은 죽었지만, 상춘재 앞 백송은 지금도 살아있다.
노태우는 88올림픽, 김대중은 남북정상회담… 靑 나무엔 현대사가 있다

노태우 대통령이 새 본관 건물이 세워지기 전인 1988년 식목일에 심은 구상나무의 현재 모습. /눌와


조선일보

노태우 대통령이1988년 식목일에 구상나무를 기념식수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노태우 전 대통령은 서울 올림픽 성공을 염원하는 뜻으로 1988년 식목일에 구상나무를 심었다. 구상나무는 세계 어디에도 없고 한국에서만 자라는 희귀 수목으로, 학명( Abies koreana)에도 한국을 뜻하는 ‘코레아나(Koreana)’가 들어있다. 박 교수는 “구상나무는 산꼭대기 같은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데, 환갑 정도 된 이 나무가 따뜻한 서울에서도 잘 자란 것은 1991년 지어진 본관 건물 옆으로 시원한 바람골이 생겨서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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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이 1994년 식목일 기념식수한 수궁터 산딸나무. 하얀 꽃이 활짝 핀 모습/ 눌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산딸나무를 기념식수했다. 기독교 전설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쓰인 나무가 ‘도그우드’라 불리는 산딸나무 종류였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식목일 수궁터에 부인 손명순 여사와 함께 산딸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초여름에 층층으로 피는 하얀 꽃이 아름다워 눈에 띈다. 김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93년 청와대 시화문 건너 옛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 가옥 다섯 채를 헐고 무궁화 동산을 만들었다. 개원식에 참석한 그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밀실 정치를 깨끗이 청산한다는 의미 깊은 현장”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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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이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해 2000년 6월 17일 영빈관 앞에 기념식수한 무궁화. /눌와

영빈관 앞에는 무궁화 한 그루와 ‘김대중 대통령·이희호 여사 기념식수’라는 큼지막한 돌 비석이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이를 기념해 18살 홍단심 무궁화를 심었다. 당시 무궁화 전문가로 잘 알려진 심경구 성균관대 교수에게 몇 번이나 경호처 고위 직원을 보내 가장 좋은 무궁화를 기증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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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심판 기각 직후인 2004년 5월 16일 백악정에 기념식수한 서어나무. /눌와

청와대 밖 백악정 앞에는 2004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서어나무가 자라고 있다. 서어나무는 꽃이 아름답지도 않고 목재로도 쓰임새가 거의 없는 평범한 나무라 대통령 기념식수로 거의 쓰이지 않는다. 박 교수는 “대통령 기념식수로는 굉장히 이례적”이라며 “권위주의를 무너뜨리고 서민들과 눈높이를 맞추려던 노 전 대통령의 국정 철학과 연결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의 소나무를 2년 연속 심었다. 임기 첫해인 2008년 4월 정문에서 본관과 녹지원 방향으로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 옆에 반송을 닮은 원뿔 모양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고, 다음 해 식목일에도 거의 같은 나이의 닮은 소나무 한 그루를 녹지원 서쪽 입구에 심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정치를 시작한 대구 달성에서 이팝나무를 가져다 2013년 청와대 경내에 심었다. ‘이팝나무’ 이름에는 여러 설이 있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옛사람들은 꽃이 활짝 피었을 때의 모습에서 수북이 올려 담은 흰쌀밥 한 그릇을 연상했다고 한다. 조선 왕조 임금의 성이 이(李)씨이므로 벼슬을 해야 이씨가 주는 귀한 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해서 쌀밥을 ‘이(李)밥’이라 했고, 꽃이 활짝 피었을 때 모습이 이밥 같다고 ‘이밥나무’라 하다가 이팝나무가 됐다는 설이다. 꽃피는 시기가 대체로 양력 5월 5~6일경인 입하 무렵이라 ‘입하나무’로 부르다가 이팝나무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박 교수는 “나무에 무슨 귀족 나무가 있고 서민 나무가 있겠냐만, 굳이 따진다면 이팝나무는 배고픔의 고통을 아는 서민 나무의 대표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식물에 관심이 많았고 해박한 지식도 갖추고 있었다. 모감주나무를 남북 정상회담 기념으로 북한까지 가져가서 심었고 임기 마지막 해에는 청와대 경내에 기념식수하기도 했다. 2019년 4월에는 상춘재 앞에 동백나무를 기념식수했다.


[허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