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라이프]by 조선일보

“남편이 똘끼 충만? 정치에 빌붙자고 옳지 못한 일 해선 안되잖아요”

[아무튼, 주말]

[김성윤 기자의 공복]

‘백수’ 된 정치인 금태섭 전 의원과

미식계 괴짜 서현정 부부가 사는 법

조선일보

서현정 금태섭 부부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후보자는 오랜 기간 SNS를 통해서 사회 문제, 특히 공정함에 대해 발언해왔습니다.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은 ‘그래도 이 세상에는 가치를 지켜 가며 사는 분이 있구나. 본보기가 되는 분이 있구나’란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후보자가 지금까지 해온 말과 실제 살아온 삶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 충격을 받은 겁니다. (중략) 지금까지의 언행불일치, 그리고 젊은이들의 정당한 분노에 대해서 동문서답식 답변으로 상처를 깊게 한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2019년 9월 6일 열린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국회 인사청문회. 금태섭(55)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조 후보자에게 이렇게 질의하자, TV로 청문회를 지켜보던 국민들이 “여당 의원이 어떻게 저런 비판을 하느냐”며 화들짝 놀랐다. 이날 금태섭 의원 휴대전화엔 2만여 개의 문자폭탄이 쏟아졌다. 그는 “그날 이후로 문자 수신 기능에 장애가 생겼다”고 했다.


그렇게 욕을 먹고도 탈당할 때까지 민주당에 대한 쓴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손혜원 전 의원의 부동산 투기 의혹을 지적했고, 공수처법 표결에서는 기권표를 던졌다. 결국 2020년 총선 경선에서 탈락했고, 기권 표결로 징계받았다.


2021년 3월 국민의힘 로고가 새겨진 빨간 점퍼를 입고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캠프 공동선대위원장에 올랐다. 국민의힘에서는 “가장 많은 표를 끌어올 인사”라며 환호했지만, 민주당에서는 “배신자” 낙인을 찍었다. 국민의힘에서 잘나가는 듯했지만 잠시였다. 대선 때 윤석열 선거대책위원회에 합류했다 1개월여 만에 떠났다.


서현정(55)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뜨거운 감자가 까맣게 타버리지 않도록 30여 년간 곁에서 ‘요리’해온 여인이다. 금 전 의원과 고교(여의도고)·대학(서울대) 동기동문이기도 한 서씨는 “공수처 표결 당시 ‘혼자서 그럴 필요는 없지 않으냐’ 했지만, 정치에 빌붙어 있으려고 옳지 않은 일을 할 순 없다”며 남편의 소신을 강력히 지지해준 우군이다. 미식계 괴짜 인사이기도 하다. 인류학 박사이면서 여행사를 운영하고 최근엔 서울 광화문에 한식당을 열었다.


오픈 준비로 바쁜 지난 15일 부부를 만났다. 남편을 바라보던 서씨가 “백수가 되더니 식당에 손님들도 데려오고, ‘영업’에 열심”이라며 웃었다. 금 전 의원은 “우리 가족 생계가 걸렸으니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소리 내어 웃었다.


◇백수 된 정치인? “설거지도 합니다”


-정치하던 남편이 ‘백수’가 돼 식당을 낸 건가.


금태섭(이하 금): “백수 아니다(웃음). TV조선 ‘강적들’에도 나가고, 법률 자문도 한다. 재판 관련 업무만 안 한다. 정치하는 동안은 안 하겠다고 맘먹었다. 국회의원이 아니다뿐이지 내 정체성은 정치인이다.”


서현정(이하 서): “생계 위한 것 맞다. 하지만 생계를 위한 활동은 여러 가지가 있다. ‘K컬처’가 세계적으로 핫한 시점에 한식과 한국 문화를 제대로 알리는 일을 하고 싶었다. ‘서울에서 단 한 번만의 식사가 허용된다면 꼭 가고 싶은 레스토랑이 콘셉트다. 음식뿐 아니라 도자기, 목기, 반상, 한지 등 분야별 최고 장인이 만든 작품을 쓴다.”


-윤석열 캠프에선 왜 나왔나.


금: “사람들은 ‘윤석열 캠프에 있었으면 좋은 자리에 가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정치인이란 개인의 이익 추구가 아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느냐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어떻게든 정권 교체가 필요해서 힘을 합하려고 선대위에 들어갔고, 들어가 보니 내가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해 나왔다.”


-윤 후보와 결별한 김종인 전 총괄선대위원장 때문이었나.


금: “김 위원장은 경륜과 경험이 많고, 정치권에서 얘기 나눠본 분들 중에 가장 공사(公私)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모든 관심이 전적으로 공적인 데 있는 분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나와서 함께 나온 건 아니다.”


-특별히 맡은 자리나 역할이 없는 남편이 짠할 것도 같다.


서: “수입이 없는 거?(웃음) 아이들도 나도 소신을 지키는 남편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자기가 원하는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얼마 전엔 외출했다 돌아오니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있더라. 전에는 그렇게 시켜도 안 하더니, 하하!”


-한동훈 법무장관 지명 등 윤석열 첫 내각 인선은 어떻게 평가하나.


금: “어쨌든 국민 뜻에 따라 당선된 분이니, 본인의 뜻대로 리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1기 내각에 대해서는 기대만 얘기하고 싶다.”


-민주당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검수완박’을 추진하고 있다.


금: “윤리적 측면에서나 정책적 측면에서 결코 찬성하기 어렵다. 자신들이 검찰을 활용할 수 있었을 땐 최대한 이용하다가, 검찰이 말 듣지 않고 정권도 내주게 되자 검찰 수사권을 박탈하겠다고 한다. 염치 없는 짓이다. 정책적으로 수사권과 기소권 분리는 타당하고 세계적 추세이다. 그러나 경찰에 수사권을 전담하게 하려면 비대해지는 경찰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검찰에 통제권을 줘야 한다. 검찰이 통제받지 않고 수사해 문제였다면, 앞으로는 경찰이 통제받지 않고 수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검찰은 1만명, 경찰은 15만명이다. 권한남용이 일어난다면 어느 쪽이 더 큰 피해를 불러오겠나.”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해야 할 말 참지 못하는 남편


금 전 의원은 “할 말이 있으면 못 참고,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안 하면 더 큰 후회를 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검사였던 금태섭이 법복을 벗게 된 것도 성격 탓이었다. 그는 2006년 한 일간지에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란 칼럼을 썼다. ‘수사 기관에 가면 아무것도 말하지 마라. 피의자가 수사에 협조할 의무는 없다. 모든 것을 변호사에 맡기라’는 내용이어서 검찰이 발칵 뒤집혔다. 10회 연재로 계획돼 있었지만 1회로 끝났다.


-왜 그런 칼럼을 썼나.


“검사 11년 차 때였다. 10년이 넘었으면 조직에 대한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한 결과 ‘다들 검찰 수사를 받는다고 하면 스트레스인데, 검찰이 이런 서비스를 제공한다 알려준다면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윗선에 보고를 안 하고 쓴 건가.


“칼럼이 실린 날 새벽 부장이 전화해 ‘넌 왜 나한테 보고도 없이 이런 걸 했냐’며 대로했다. ‘보고를 미리 하면 부장님도 위에 보고해야 하는데,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되물었더니 부장도 ‘그건 그렇네’ 하시더라(웃음).”


-칼럼 사건으로 검사를 그만둔 건가.


“검찰 수뇌부에서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내 예상 시나리오는 ‘인사 불이익을 받아 지방만 돌아다니게 되지 않을까’였고, ‘그것도 괜찮은 한판의 바둑이다’ 생각했다. 검사로서 일할 만큼 한 거고, 평생 말할 거리가 생기는 거였다. 그런데 6개월간 일을 안 주더라. 쫓겨나듯 나왔다.”


-검사를 천직으로 여겼다면서 후회는 없나.


“그러지 않았으면 20년, 30년 검사 생활은 할 수 있지만, 변하는 게 없고 조직에 기여하는 것도 없지 않나.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안 했다면 더 큰 후회 했을 것 같다.”


금 전 의원 아버지는 법조인 고(故) 금병훈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 판사였던 금병훈 변호사는 사법 파동을 이끌다 법관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집안에 반골 기질의 DNA가 있나 보다.


“검사가 됐을 때 아버지께서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으셨다. ‘이왕 들어왔으니 검찰총장도 하고 법무부 장관도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니 아버지가 막 웃으시더라. ‘나는 처음 판사가 됐을 때 평생 시골에서 판사만 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건방지게 검찰총장이 어쩌고 하느냐’라며. 평소 아버지는 ‘지식인이라면 비판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분위기가 출세엔 도움이 안 되고 사고를 치게 만들었다. 나중에 아버지께서 ‘너는 애가 참 괜찮은데 왜 야당 기질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라(웃음).”


-정치에 입문한 계기는.


“검찰 나올 때 수뇌부에서 ‘이 친구가 정치하려 한다’고 험담했다. 그래서 정치는 절대 안 하려 했다. 그런데 당시 검찰총장님 말씀이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여럿이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였다. 그 말씀은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럿이 같이 하는 일인 정치에 관심이 생겼고, 기회가 생겨서 하게 됐다.”


-’똘끼가 있다’ ‘튀려고 저런다’는 비판도 많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발언을 하고 글을 쓰는 자체가 다양한 생각을 얘기해보자는 취지에서 하는 거다.”


-민주당 시절 ‘금태섭은 정무 감각이 떨어져 피아(彼我) 구별 안 하고 마구 똥볼만 찬다’는 댓글이 많았다.


“나처럼 하는 게 조직에 훨씬 도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당에 피해가 가더라도 바른말을 하자’는 게 아니라, ‘이게 우리 당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하는 거다. 개인도, 조직도, 사회도, 나라도 실수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억지를 부려서라도 ‘잘못한 게 아니다, 잘한 거다’라고 얘기하면 결국은 해(害)가 된다. 정당이 냉정하게 자기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신뢰도가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토머스 제퍼슨은 ‘비판은 가장 고귀한 형태의 애국’이라고 했다.”


-한 칼럼에 ‘선거에 이기려면 핵심 지지층에만 잘 보이면 된다’라고 쓴 적도 있다.


“한 번 선거하는 거면 그렇다. 하지만 그게 쌓이면 뒤집어진다. 우리나라 유권자들은 대단히 현명하게 판단한다. ‘우리는 지지자들에게만 잘하면 된다’는 정치공학에 대해 반드시 뜨거운 맛을 보여준다. 얄팍하게 계산해 한목소리를 내면 될 것 같지만, 길게 봐서는 그것이 정권교체의 원인이 된다. 자기비판을 못 하고 고인 물이 되면 반드시 교체된다.”


◇식당 서빙하며 ‘박사’ 된 아내


서현정 대표도 남편 못잖은 괴짜다. 박사 논문을 쓰려고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다. 논문 주제가 ‘외국에 들어온 이탈리아 음식’. 석사 논문 때는 서울 남산 ‘라쿠치나’에서, 박사 논문 때는 미국 하버드대 방문학자(visiting scholar)로 보스턴에 지내면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석·박사 논문을 식당에서 일하면서 썼더라.


“이탈리아 음식뿐 아니라 특정 국가의 음식이 다른 나라·문화에 흡수돼 어떻게 변화하는지 알고 싶었다. 석사 과정이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에 외국 음식점이 별로 없었다. ‘라쿠치나’는 지금도 훌륭하지만 특히 그때는 최고로 ‘핫’한 이탈리아 식당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에서는 본토엔 없는 피클을 내주는데, 반찬이 있어야 하는 한국인에게 맞춘 것이다. 이탈리아에 없는 ‘미트볼 스파게티’는 미국으로 이민 간 이탈리아 사람들이 앵글로색슨족 등 기존 미국인 취향에 맞춰 개발했는데 전 세계로 확산한 경우다.”


-학생운동 격렬했던 80년대를 갓 지난 시기였다.


“많은 선배가 ‘아직 이런 거 연구할 시대는 아니다’며 좋지 않게 봤다. 대부분 농촌이나 공장으로 가서 연구하던 때였다. 눈치 보면서 힘들게 썼다(웃음).”


-박사 논문은 미국 가서 썼더라.


“보스턴에서 일하며 썼다. 갓 태어난 큰애를 데려가 키우며 논문 쓰려니 엄청 힘들더라.”


-양가 부모님께 맡길 순 없었나.


“친정 엄마는 치매인 할머니를 돌보느라 여력이 없었고, 시어머니는 ‘남편 두고 어딜 혼자 공부하러 가느냐’며 유학을 반대하셨다.”


금 전 의원은 “부모님이 나도 당연히 반대하리라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세대가 다르니까, 도움 주지는 못했지만 다녀오라고 했다.” 서 대표는 “그 시절엔 아내가 공부하러 가게 해준 것만으로도 크게 도와준 것”이라고 했다.


-이번 개업한 ‘주은’이 세 번째 식당이다.


“미국에서 돌아와 작은 수프집을 열었다. 지금 하면 잘됐을 텐데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 그다음엔 서울대 앞에서 태국식당을 열었는데 나름 장사가 잘됐다.”


-식당과 여행사를 차릴 만큼 음식과 여행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있나.


“음식은 어머니 영향이 크다. 부유하진 않았는데 나름 철종 직계라며, 왕족이라고 맨날 자랑하셨다(웃음). ‘서울 음식은 이래야 한다’ ‘파는 이렇게 다져야 된다’ 등등 음식 얘기를 마르고 닳도록 하셨다. 여행은 아버지 영향. 우리 부녀(父女)의 성에 차는 여행사가 없어서 결국 내가 차리게 됐다(웃음). 독일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가 포르셰를 설립한 이유로 ‘마음에 드는 차가 없어서 내가 만든다’고 한 말이 마음에 들어서 한동안 카톡 대문에 걸어놨었다.”


서 대표의 아버지는 ‘오리엔탈정공’ 서종석 회장이다. 서 회장은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관리이사로 일하다 퇴사해 오리엔탈정공을 1986년 인수했다. 금 전 의원은 “장인 어른이 음식을 좋아하셨고, 2020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연말이면 손주들까지 모아 놓고 요리 대회를 열었다”고 했다.


◇금수저처럼 생겨서 죄송합니다


금 전 의원은 2013년 ‘새정치 추진위원회 대변인’으로 정치에 입문했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흔히 ‘정치는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말한다. 금태섭 서현정 부부는 정치 현안에 대해 바통 터치 하듯 막힘 없이 말을 이어갔다. 마치 뇌는 하나이고 입은 둘인 샴 쌍둥이 같았다.


-조국 비판, 민주당 탈당에 후회는 없나.


금: “전혀 없다. 꼭 해야 되는 일이고, 거기에 따른 불이익은 감수하겠다고 생각했다. 조국 장관 청문회 때 가족에게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줘서 미안하다는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아들이 ‘잘했다’고 하더라.”


서: “문자폭탄이 쏟아지니 휴대전화가 계속 ‘드드드드~’ 울리더라. 안 보면 되지 하지만 실제로 오면 그렇게 안 된다.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연예인들이 왜 악플 읽고 자살하겠나.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버텨내는 남편이 존경스러웠다.”


금: “정치인으로서는 제일 고민스러운 게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혹시 내가 틀렸는데 억지나 고집을 부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다. 미리 충분히 생각하고 했던 말과 행동이지만, 그래도 워낙 많이 공격당하면 힘들다.”


-1993년 결혼했다.


서: “고2 때 문학의 밤 행사에서 만났는데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


금: “대학 가서 더 친해진 것 같다. 엄혹한 시절에 대한 얘기들 나누면서 조금씩. 1992년 사시에 합격하니 갑자기 조건이 좋아지더라(웃음). 양가 허락 받고 다음 해 결혼했다.”


서: “양쪽 어머니 존함이 ‘영자’다. 우리 어머니는 이영자, 시어머니는 김영자. 상견례 때 우리 아버지가 어디 앉을지 머뭇거리자, 시아버지께서 ‘어디 앉으나 영자 옆인데 뭘 고민하십니까. 아무 데나 앉으세요’라고 하셔서 엄청 웃었다.”


-금수저 부부라는 시선도 있다.


금: “제 아버지는 농사 짓는 집안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분이다. 장인어른도 본인이 사업을 일으킨 분이다. 두 분 다 자신의 노력으로 당대에 자수성가했다. 언론 인터뷰할 때 늘 나오는 질문인데, 그때마다 싸우기도 뭣해서 ‘받은 만큼 기여하고 살겠다’고 대답하지만 사실 금수저라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내가 봐도 금수저처럼 생기긴 했다, 잘생겼다 못생겼다를 떠나서, 하하하!”


서: “(남편 발언에 대해) 죄송합니다.”


-20대 아들만 둘이다. 여성가족부 폐지 논란은 어떻게 보나.


금: “선거 공약을 100%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거 몇 년간 민주당 정권에서 여가부가 제 역할을 제대로 못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여가부 폐지는 재고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아직까지도 OECD 국가 중에서 성평등 하위권이고 개선할 점이 많다. 여가부를 통해 앞으로 할 일이 많다.”


-대선에서도 첨예했던 이대남·이대녀 젠더 갈등은 어떻게 보나.


금: “갈등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선거운동은 중요하지만, 어느 한쪽을 배제하는 식의 정치는 절대 피해야 한다. 이대남을 중심으로 세대 포위론을 하면 크게 이길 거라고 해서 여가부 폐지를 내세웠다가 오히려 크게 질 뻔하지 않았나. 여성 배제 정치가 윤리적으로도 틀렸고 정치공학적으로도 안 먹힌다는 걸 보여준 거다.”


서: “젊은 남자들 반목이 심해 놀랐다.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하더라. 우리 큰아들도 나름 여성적으로 키워보려고 노력했는데도, 여자를 보는 적대적인 시선이 있더라. 어른들이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BTS 군 면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큰아들은 의경으로 군 복무를 마쳤고, 둘째 아들은 코로나로 입대가 미뤄진 상태다)


서: “아들이 그러더라. ‘여자들은 애를 낳을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지만, 남자들은 군대에 대해 선택권이 없다.’ 할 말이 없더라.”


금: “군대를 누구나 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는 게 제일 좋겠다.”


서: “이래서 정치인! 답을 원했는데 딴 얘기를 하잖아, 하하!”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실시간
BEST
chosun
채널명
조선일보
소개글
대한민국 대표신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