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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서에 써내려간 어느 독립운동가의 삶과 눈물

이규채… 쌍성보전투 승리 이끈 독립운동가

일제탄압·가족에 대한 미안함 등 54쪽에 걸쳐 자필로 기록한 연보


"새벽녘이 되어서야 왼쪽 손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곁에 있던 사람이 먼저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1932년 9월 하얼빈 남쪽의 쌍성보(雙城堡)에서 한·중 연합군과 일본군이 교전을 벌였다. 쌍성보는 만주의 경제적 요충지로, 1년 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호시탐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당시 만주의 한국독립당 총무위원장이자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독립운동가가 이규채(1890~1947) 선생이다. 전투에서 왼손에 총상을 입었지만, 전투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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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채가 가석방으로 풀려난 뒤 고향 경기도 포천의 상점 계산서를 빌려서 빼곡하게 기록한 독립운동 연보. 계산서 상단에 ‘하기(下記)와 여(如)히 하조(荷造)이온바 사수(査收)하심 복원(伏願)이로소이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아래와 같이 물건이 있으니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란 뜻이다. /일빛 출판사

일제 말기인 1944년 이규채가 하나하나 자필로 기록한 독립운동 연보가 75년 만에 빛을 보았다. 그의 자필 연보와 일제의 신문조서, 재판 기록과 관련 기사 등을 묶은 '이규채 기억록'(일빛)이 최근 출간됐다. 해제를 붙인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은 "일제에 의해 기록된 자료들과 달리 독립운동가 본인이 자신의 활동을 기록한 것으로, 삶의 생생함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규채는 1924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상하이와 만주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4년 체포돼 6년간 수감됐다. 1940년 가출옥으로 석방된 뒤에는 고향인 경기도 포천에 은거했다. 광복 직전인 1944년, 그는 포천의 동네 가게인 '김수명 상점'에서 갱지와 습자지로 된 계산서를 빌려 자신의 독립운동 기록을 연보 형식으로 꼼꼼히 적어나갔다.


"1890년 6월 7일 자시(子時)에 태어나다"로 시작한 연보는 가족들의 극심한 생활고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의 표현으로 끝난다. "아내 이씨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온 지는 26년이 되었다. 이씨는 나와 멀리 헤어지고서 두 아들과 한 딸을 거느리고 살았다. 초근목피로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것은 하루이틀에 불과할 뿐이었다. 다섯 살 난 아이가 수시로 밥 달라고 하는 것은 빈 젖을 물려서 달랠 수 있지만, 여덟 살 난 아이가 배고프다고 우는 소리는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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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규채가 1935년 서울로 압송돼 일제의 조사를 받을 당시의 수형 기록 카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이렇게 자필로 적어나간 독립운동 연보는 모두 54쪽에 이른다. 박 관장은 "당시 일반 종이를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상점의 계산서 묶음을 얻어서 기록한 것"이라며 "당시 선생의 생활이 넉넉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화 '밀정'이나 '암살'처럼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회유로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끊임없이 내부 첩자를 의심하고 감시해야 했던 상황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규채도 1933년 베이징 한국독립당 회의에서 '일제의 회유에 넘어갔다'는 의심을 받고 사형 위기에 놓인다. 동료들의 변론으로 사형을 면했지만 무기한 당권을 정지당했다. 하지만 그는 1934년 체포된 이후에도 일본 총영사에게 "2000만 민중의 마음을 귀순시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며 "2000만 민중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는 독립운동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민족주의자인 이규채는 1930년 5월 공산주의자와의 갈등으로 하얼빈 인근 영통산에서 생매장 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구출되기도 했다. "○○당(공산당)이 뒤따라 왔는데, 회피하지 못하고 한밤중에 생매장을 당하게 되었다. 아, 아무것도 모르는 무리들이 횡행하여 이런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일제의 체포와 연보 압수를 우려한 이규채는 김좌진·이승만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인명이나 공산당 등의 단체명을 명확히 표기하지 않고 공란(空欄)으로 비워놓기도 했다. 박 관장은 "독립운동가들의 생생한 노정은 물론, 만주 지역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새로운 사실 확인의 단초를 제공하는 중요한 사료"라고 했다.


이규채는 광복 이후 반탁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1947년 3·1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다음 날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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