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환자의 천국, 네덜란드 호그벡 마을의 비밀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장미대선의 승자는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길지 않았던 대선 준비기간 동안 그는 ‘문재인1번가'라는 대한민국 최초 정책 쇼핑몰을 선보이며 자신의 다양한 공약을 전달했다.
그중 유독 눈에 들어온 공약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치매 국가 책임제'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장모님도 중증 치매로 고생 중이라며 치매는 개인이나 가족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가 제안하는 치매 국가책임제의 주요 정책 5가지는 아래와 같다.
첫째, 건강보험처럼 치료비 본인 부담액에 상한선을 두는 ‘본인부담 상한제’, 둘째, 경증환자에게도 혜택을 주어 조기에 치매를 발굴 및 치료하도록 돕는 ‘장기요양 보험 혜택’, 셋째, 서울보다는 지방을 중심으로 한 ‘치매 지원센터 증설’, 넷째, 5%에 불과한 ‘국공립 요양시설 확대’, 다섯째, 치매 지원센터 종사자 ‘처우 대폭 개선’.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의 주요 공약으로 내세울 정도로 ‘치매’는 분명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다. 분당서울대병원 연구진은 현재 노인 인구의 9.8%를 차지하는 치매 환자가 2050년에는 15.1%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빠른 속도로 치매 환자가 증가하는 만큼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치매로 인한 사회적 비용 역시 2013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1%, 11조 7,000억 원에서 2050년 1.5%인 43조 2,000억 원에 달할 전망이다.
수치 자료에서 오는 공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쉽게 ‘치매’라는 질병이 주는 고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동안 수많은 TV 드라마와 영화는 치매를 가정 내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그려왔으며, 각종 언론에서는 심심찮게 치매로 인한 자살 또는 살인 사건을 보도한다.
이처럼 어느 면으로 보나 행복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 치매. 가족들의 괴로움도 상당하지만, 다 표현하지 못해도 환자 본인의 고통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다른 무엇보다 치매 환자의 삶의 질에 주목한 공간이 있다. 치매 환자를 위한 천국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 설계된 곳. 바로 네덜란드 '호그벡(Hogeweyk)’이다. 호그백은 일명 치매 마을로 불린다. 치매 환자들이 가상의 마을을 이뤄 거주하는 공간으로 설계적 완성도가 매우 높다.
호그벡은 4,500여 평의 부지 안에 커피숍, 슈퍼마켓, 음식점, 공원, 미용실 등을 갖추고 있다. 입주자들은 마을 안에서 일상생활을 누릴 수 있는데 농장에서 채소를 가꾸거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물론 미술이나 요리 등 가벼운 취미 생활도 즐긴다. 갇혀있거나 제한되는 것이 중심을 이루던 기존의 요양 병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고 치매 마을이 일반 마을과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이들이 이용하는 마트에는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으며 미용실에서도 돈을 내지 않는다. 각 상점 등에 배치된 직원은 실제 인력이 아니라 요양 전문 간호사나 간병인, 노인병 전문 의사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을 안에서 치매 환자와 함께 생활하며 환자들을 돕는다. 모든 행동을 간섭하기보다는 최소한의 개입을 목표로 환자가 길을 잃거나 혼란을 느낄 때만 나서는 식이다.
호그벡에는 약 200여 명의 노인이 거주하는데 6~7명씩 한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일종의 주거 공동체로 입주자들의 특징에 따라 거주 공간이 달라진다. 각 공간은 도시적, 가정적, 기독교적 등의 특징을 지니며 입주자와 보호자는 설문 등을 거쳐 원하는 곳을 선택할 수 있다.
이는 호그벡 마을의 설계자 이본느 반 아메롱겐(Yvonne Van Amerongen)의 배려로, 그녀는 서로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익숙한 환경에 모여 살아야 스트레스도 덜 받고 갈등도 줄일 수 있다고 봤다. 마을 곳곳에서 돋보이는 특징 역시 그녀의 작품이다.
1992년 요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이본느는 치매 환자를 위한 좀 더 자유로운 공간이 필요하다고 봤다. ‘치매 환자도 삶의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병원 경영진에게 치매 마을을 제안했고 이후 정부 지원 등을 받아 2009년 호그벡의 문을 열었다.
호그벡은 현재 치매 돌봄의 성공적인 사례로 손꼽히며 전 세계로 퍼져가고 있다. 프랑스와 스위스, 영국도 이를 본뜬 마을을 건립 중이며 국내 기관에서도 탐방을 가곤 한다.
이러한 반응이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호그벡 모델은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단순히 호그벡 마을을 따라 하자고 말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호그벡 이용 가격은 정부 지원금을 포함, 1인당 월 700만 원이다. 평균 대기자는 80여 명으로 보통 1년 정도의 대기 기간이 소요된다. 다소 높은 가격과 시간 부담이 있는 셈이다.
만약 우리나라에도 호그벡 같은 치매 마을이 생긴다면 어떨까? 호그벡은 물리적으로만 따지면 약 255억 원을 들여 3년 만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우리도 그만큼의 시간과 자본을 투입한다고 해서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까?
그 답을 쉽게 내릴 수는 없지만, 호그벡 마을에서 배워야 할 점은 분명해 보인다. 호그벡 마을이 지닌 진정한 가치는 물리적인 환경이 아닌 ‘치매를 대하는 자세’에 있다. 네덜란드는 2004년부터 ‘전국 치매 프로그램’을 수립하여 운영 중이다. 조기 대응이 핵심 과제로 치매 환자가 최대한 일상생활을 유지하도록 돕는 게 목표다.
이는 전문가들 역시 강조하는 부분으로, 치매에 관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ADL(Activities of Daily Living, 일상생활 능력)을 유지해 삶의 질을 지키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실제로 네덜란드는 치매 환자의 80%가 가정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그중 절반가량은 혼자서 생활한다. 호그벡 같은 요양원에 입소하는 경우는 24시간 관리가 필요한 중증 치매 환자뿐이다. 이렇듯 호그벡은 단순히 한 요양 시설의 성공이 아니라 네덜란드 정부의 오랜 노력과 민간의 아이디어가 만나 빛을 발한 경우에 가깝다.
세상에 하나의 정책, 꿈 같은 공약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없다. 관건은 문제에 대한 고민, 그 깊이에 달려있다.
Images courtesy of Hogeweyk
에디터 이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