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한데, 제가 영어 원어민 화자가 아니라서요...
책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리뷰
책을 읽고 미안하다는 감정을 느끼기는 처음이다. 작가가 얼마나 책을 열심히 썼는지, 영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옮긴이가 얼마나 수고했는지도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가 없다. 그 이유는 내가 영어 화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뒤에 적혀 있는 미국 유수 저널들의 찬사는 분명 아주 조금의 과장이 보태진 진심일 것이다. 분명 사랑스럽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책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말들이 번역되어 영어 원어민 화자가 아닌 사람에게 읽힐 경우 이 모든 매력은 바닥 가까이까지 뚝 떨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을 대신해 이 책을 대변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가 없었다고 마무리지을 것이다. (여전히 미안하다.)
해명 1. 작가는 정말 재미있게 구성했어요!
비극 1. 저는 영어 원어민 화자가 아닌 걸요.
책의 차례 구성부터 작가는 정말 노력을 기울였다. Hranfkell이라는 단어가 [흐라픈켁]이라는 발음이라는 것을 알고 중세 영어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부터 각 주제에 맞는 단어를 목차 명으로 구성했다. 나쁜 단어는 Bitch(계집애, 나쁜 기집애, ~년 등), 틀린 단어는 Irregardless, 어원에 대한 설명의 제목은 Posh로 달아 놨다.
자, 여기서부터 오류가 발생한다. 잠깐 나의 소개를 하자면, 나는 영어 원서를 100% 알지는 못해도 해리포터를 읽고 80% 이해할 수 있으며, 암스테르담에서 영어로 사회학 수업을 듣고 10장짜리 에세이를 내봤으며, 평소 회화가 술술 나오는 정도는 아니지만 다 알아듣고 대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irregardless(무관한)의 의미를 모르며 posh(우아한, 상류층의)도 작년에 영국 여행에 가서 알게 된 단어다. Pragmatic(실용적인)은 수능 영어에서나 봤던 단어다. 저 단어의 뜻을 모르니까, 저 단어가 가진 의미를 모르니 작가의 재치 있는 구성이 하나도 먹히지 않는 것이다. 아아. 나의 영어를 탓할 수밖에 없지만 이건 작가가 이야기한 메리엄웹스터 사전 편찬자의 자격 중 하나 미달이라서 아마 영어를 아무리 공부해도 완벽한 재미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바로 ‘원어민 화자’ 자격 미달. 각 단어가 가진 미묘한 느낌과 사용방법을 체득하지 못했으니 이 책을 백퍼센트 재미있게 읽을 수 없다. 비극이다.
해명 2. 작가의 예시는 정말 풍부하고, 옮긴이도 열심히 번역했다고요!
비극 2. 그래도 재미가 떨어지는 걸요.
아마도 옮긴이는 영어를 매우 잘하는 사람일 것이다. 영어 원어민 화자가 이해할 수 있는 농담들을 이해하고 기꺼이 이 책을 번역하겠다고 맡았으니, 영어를 얼마나 잘하는 사람일지는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책을 원서로 먼저 읽고,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라니!’ 감탄하며 자진해서 이 책의 번역을 자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번역은 원래 언어의 맛을 어쩔 수 없이 바꿔버린다. 이 책의 경우, 원래 언어의 맛이 곧 재미인 책이라서 맛이 떨어진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가장 강하게 다가온 부분들 중 하나의 예시는 틀린 단어에 관하여(Irregardless)에 있다. 작가는 남부 흑인 영어와 동부 백인 영어의 차이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표준어가 아닌 말을 사용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사람들을 판가름하는지 서술한다. 우리말의 경우로 대입하면 이해가 간다. 작년 많이 유행했던 ‘외않됀데?’는 문법/맞춤법 나치들을 저격한 말이고 나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나 또한 ‘되’와 ‘돼’의 사용을 못한 문장에는 ‘제발 이것을 고쳐주세요!!’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이 문장을 영어로 표현했을 때, 그들이 이걸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절대 못할 것이다. “비슷한 소리니까 그냥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니야?“라고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냥, 저건 정말 기본이고, 간단한 규칙인데 안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봐야 ‘별 것도 아닌 건데’라는 생각을 고칠 수는 없을 것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나는 중학교-고등학교 때 배운 수능 문법을 기준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 ‘I’m done my homework’가 동부 방언이고 ‘I’m done with my homework’가 표준어라고 설명하고, 이것으로 인해 지적받을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라는 과제를 던져주면 참 난감한 것이다. 멕시코의 업토크를 고쳤다고 하는데, 업토크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유남생’이라는 철지난 유행어로 saying[쌔잉]을 sayin’[쌔인ㄴ]이라 말하는 흑인 영어의 특징까지 이해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다. 이 외에도 옮긴이는 다양한 주석으로 우리의 이해를 도우려 노력한다. 그런 노력이 보여서 더욱 안타깝고 미안하다. 옮긴이도, 작가도 몹시 영어를 잘 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노력해주시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재미가 떨어지는걸요.
해명 3. Irregardless! Moist! 느낌이 안와요?
비극 3. 저는 Irregardless를 모르고, moist가 왜 ‘우웩’하는 단어인지 모르겠어요.
Irregardless는 무관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챕터 내내, 작가는 이 단어에 대한 직관적인 번역보다는 이게 얼마나 엉망진창인 단어인지의 감탄을 반복한다. 당연하다. 번역을 염두하고 쓴 책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네이버 영어사전에 검색을 해보니 Irregardless는 잘못된 단어이고 유의어로 regardless를 알려준다. 아, 이제야 이해가 간다.
Regard는 '~에 관하여'라는 뜻이다. 여기 무엇이 없다는 less(양심리스의 그 less다)를 뒤에 붙이면 '연관없다, 무관하다'는 뜻이 된다. 여기에 역접을 뜯하는 ir-을 붙이면 다시 '유관하다'는 뜻이 되어야한다.(responsible 책임감 있는 – irresponsible 책임감 없는) 그러나 이 단어는 무관하다는 뜻을 가지므로, 여기서부터 혼란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이 단어를 이해하기까지 이만큼의 단계가 걸렸다. 원어민 화자라면 단번에 피식 웃으며 이 단어를 보고 인상을 찌뿌리거나 관심있게 챕터를 읽었을 것이다. 몇몇은 이 부분을 읽으며 moist가 역겨운 단어라는 데에도 동의했을 것이다. 어렴풋이 ‘점액질’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내가 느끼는 그런 약간의 역겨움과 닮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반복이다. 나는 영어 원어민 화자가 아니고, 영어를 완벽히 구사하지 못해서 그것이 주는 느낌, 즉 슈프라흐게퓔(sprachgefühl)을 평생 모를 것이라는 것이다. 슈프라흐게퓔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힘든 제가 감히 영어의 그 깊고 넓은 바다를 알 수 있을까요.
작가의 열정과 번역자의 능력, 출판사의 노력 모두 잘 알겠다. 그럼에도 그런 재미가 전해질 수 없어서 너무 슬펐고 미안했다. 하지만 사전 편찬자가 꿈인 사람, 영어를 아주 잘하고 평소 어떤 영어 단어에 대한 느낌이 확실한 사람은 분명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을 것이다. 그러니 이 리뷰는 짧게 출판사, 작가, 옮긴이에게 남기는 말로 마무리한다.
“이 재미있는 책을 저의 부족으로 이렇게 지루하고 힘들게 읽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럴 수밖에 없는 책이었어요. 나중에, 제가 영어를 정말 잘하게 되면, 그때는 이 책이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슈프라흐게퓔’을 공부로 깨달을 수 있을까요? 저는 한국어 원어민 화자인걸요. 차라리 옮긴이님이 한국어 버전의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를 만들어주시는 건 어떨까요. 그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나연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