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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by 한국일보

지리산과 덕유산 사이 억새 능선... 그 아래 문명과 거리 둔 산골마을

장수군 장안산 억새 산행과 지실가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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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가 하얗게 덮인 장수 장안산 능선 너머로 지리산 산줄기가 첩첩이 이어져 있다. 해발 1,200m가 넘는 고산이지만 덕유산과 지리산에 가려 덜 알려진 산이다.

전북에서 ‘무진장’은 무주 진안 장수 3개 군을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다함이 없이 굉장히 많다는 사전적 의미와 결부한다면 단연 산이다. 장수는 평균 해발 430m로 전북 고원지대 3개 군 중에서도 가장 높다. 그 중심에 장안산이 있다. 해발 1,237m 고산이지만 인근 덕유산, 지리산에 가려 덜 알려졌다. 그래도 가을이면 산등성이를 하얗게 뒤덮은 억새를 보기 위해 등산객이 제법 몰린다. 능선 아래 골짜기에는 국내에서 전기가 가장 늦게 들어온 오지 마을도 숨어 있다.

지리산 덕유산 양쪽에 품은 장안산 억새 물결

장안산은 장수읍과 계남 장계 번암 3개 면에 걸쳐 있는 군립공원이다. 덕산계곡을 비롯해 26개 크고 작은 계곡을 품고 있다. 장안산은 흔히 알고 있는 노령산맥의 지맥에 해당하는데 등산로 입구의 안내판에는 ‘호남금남정맥’의 기봉(가장 높은 봉우리)이라 쓰여 있다.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지은 ‘산경표’의 13정맥 중 하나로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산줄기다. 호남금남정맥은 이곳에서 진안 마이산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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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산 무룡고개로 이어지는 도로가 용틀임처럼 구불구불하다. 등산은 해발 900m 지점 무룡고개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이지만 등산 코스는 의외로 평탄하다. 해발 900m 무룡고개까지 찻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무룡(舞龍)고개는 무룡궁재라고도 부른다. 용이 춤을 추듯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 같은 산줄기를 도교적으로 해석한 이름이라 한다. 고갯마루에서 양쪽으로 이어지는 도로 역시 구불구불 용틀임이다. 무룡궁에서 발원한 물은 서북으로 흘러 금강에, 동남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된다. 서남 방향의 물은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3개 큰 물줄기의 최상류에 해당하는 분수령이다.


주차장에서 초입의 짧은 계단과 오르막을 지나면 바로 능선에 닿는다. 이곳부터는 푹신푹신하고 순탄한 흙길이 이어진다. 정상까지 약 3.2km를 걷는 동안 300m가량 표고를 높이는 길이다. 여유 있게 1시간 30분가량 걸린다. 조금 숨이 찰 만하면 바로 평지로 이어지는, 아주 험한 구간 없이 꾸준히 오르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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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산 능선에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이고 억새 물결 너머로 웅장한 지리산 산줄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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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산 능선에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이고 새하얀 억새 물결 너머로 웅장한 지리산 산줄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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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장안산 능선의 억새 물결.

떡갈나무 물푸레나무 서어나무 팥배나무 낙엽이 떨어진 바닥은 조릿대로 덮여 있다. 등산로는 덥수룩한 머리를 바리캉으로 밀 듯 말쑥하게 정리된 오솔길이다. 마치 싸리울타리로 둘러진 시골 동네 골목을 걷는 느낌이다. 가끔씩 들리는 바람소리만 아니면 고산 능선을 걷고 있다는 걸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푸근하고 아늑하다. 대신 기암괴석이나 눈길을 확 끄는 자연 조형물은 거의 없다. 시각적 자극보다 자연 특유의 고요함과 심심함을 즐길 수 있는 사람에게 더없이 좋은 길이다.


그렇게 약 절반쯤 걸어 얕은 고개를 넘으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고 산중에 소금을 뿌려놓은 것처럼 눈부신 억새밭이 펼쳐진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거칠 것 없이 쏟아지는 햇살이 속살까지 파고들어 산등성이 전체가 하얗다. 바람에 일렁거리는 억새 물결 아래로 깊은 골짜기가 펼쳐지고 그 뒤로 웅장한 지리산 능선이 둘러져 있다. 첩첩이 이어진 산줄기의 푸르스름한 빛이 거리에 따라 차츰 농도가 옅어진다. 반대편으로는 남덕유산 끝자락 산줄기가 손에 잡힐 듯하고 부드럽게 흘러내린 산줄기 아래 장계 들판이 누렇게 가을 색으로 짙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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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산 능선의 두 번째 억새밭은 가파른 계단 옆 경사면에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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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산 정상에 서면 북동쪽으로 남덕유산 높은 산줄기가 손에 잡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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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산 능선을 하얗게 덮은 억새가 바람에 일렁거리고 있다.

전망대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능선을 따라 약 1km를 더 걸으면 계단 옆 가파른 경사면에 다시 억새밭이 조성돼 있다. 규모는 첫 번째보다 작지만 솜털 사이로 파고든 햇살은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이곳부터 정상까지 약 300m는 제법 경사가 가팔라 그나마 등산이라 할 만하다. 더 넓고 웅장한 경관이 펼쳐질 거라 기대하고 올랐지만 정상은 의외로 평범하다. ‘장안산’ 표석과 넓게 다진 헬기 이착륙장이 전부다. 주변에 자란 나무가 시야를 가려 조망도 억새 능선보다 뛰어나다 하기는 어렵다.

2010년에야 전기가 들어온 오지, 지실가지마을

장암산 정상에서 서쪽 골짜기를 내려다보면 깊은 산중에 호수 하나가 보인다. 관리 주체인 한국농어촌공사에서는 용림저수지라 부르지만 지명을 따 통상 덕산제라 부른다. 장수읍에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2005년 준공한 이 호수의 해발 고도는 622m, 주변에 오염원이 전혀 없어 전북에서 가장 맑은 수질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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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산 서북쪽 자락의 산중 호수 덕산제. 호숫가에서 이어지는 골짜기에 마을이 흩어져 있다.

호수로 가는 길은 장수읍에서 연결된다. 읍내에서 남쪽 산자락으로 난 도로를 따라 오르면 언덕배기에 신덕산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저수지 건설로 수몰된 덕산리 2개 부락 27가구 중 13가구가 이주해 형성된 마을이다. 일부는 아예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덕산제 주변에는 신덕산 외에도 수몰을 면한 소규모 마을이 골짜기마다 흩어져 있다. 호수에서 북쪽 산자락으로 약 3km 떨어진 지실가지마을은 그중에서도 가장 오지로 꼽힌다.


지실가지마을로 가는 길은 호수를 두르는 포장도로에서 연결되는데, 시작부터 비포장도로다. 초입의 펜션 몇 채를 지나면 더 이상 집이 없고 숲길이 이어진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길 양쪽으로 자란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여행자에겐 차 없이 산책하기 더 좋은 길이다. 장수군은 덕산제 연주마을에서 출발해 지실가지마을과 장안산 기슭을 거쳐 계남면 원장안마을까지 이어지는 8km 산길을 ‘장안산마실길’이라 이름하고 걷기 여행 코스로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이따금씩 오가는 마을 차량을 제외하면 이 길을 걷는 사람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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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실가지마을 가는 길은 차 한 대 겨우 통과할 수 있는 비포장도로다. 짙은 숲길이라 오히려 걷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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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산 깊은 산중의 지실가지마을. 전기가 들어온 지 겨우 13년 됐고, 휴대폰도 SKT만 터진다.

해발 750고지 장안산 기슭의 끝 마을, 지실가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명과 거리가 먼 오지였다. 2010년에야 전기가 들어왔고, 찻길이 난 건 그 10년 전이다. 지금도 SKT를 제외하면 휴대폰이 터지지 않아 외부와의 소통이 불가능하다. 흙이 비옥해 무엇을 심어도 농사가 잘된다는 뜻에서 ‘지실가지’라 했다는데 선뜻 말뜻을 유추하기 어렵다.


그렇게 한참 비포장도로를 거슬러 올라 마을 어귀에 닿으면 좁은 골짜기가 조금 넓어진다. 입구 ‘곰순네’ 집부터 계곡을 따라 8가구가 띄엄띄엄 자리 잡았고, 주변에 비탈밭이 형성돼 있다. 고추와 배추, 들깨 등 자급용 반찬거리를 제외하면 대개는 오미자와 산머루를 기르고 있다. 수확이 끝난 오미자 덩굴이 비탈밭뿐만 아니라 낮은 시골집 축대까지 덮고 있다.


‘곰순이’는 이 마을 첫 집 주인이자 터줏대감인 이덕희(81) 할아버지가 기르던 개 이름이다. 지금은 곰손이 손자 대까지 모두 세상을 뜨고 백구 한 마리가 집을 지키고 있지만, 할아버지 집에는 여전히 ‘곰순네’ 팻말이 걸려 있다. 처마 아래에는 올해 수확한 오미자로 담근 청이 커다란 유리병에서 곰삭고 있다. 내년 2월에나 먹을 수 있다는데 이미 주인이 다 정해졌다고 했다. 아는 사람 거의 없는 산골마을이지만 오미자만은 입소문을 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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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실가지마을 입구 곰순네 집에서 백구 한 마리가 낯선 방문객을 관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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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실가지마을 입구에 똬리를 튼 참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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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실가지마을 첫 집인 곰순네 집. 30세에 이곳에 들어온 이덕희 할아버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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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실가지마을 곰순네집 처마 아래에 올해 담근 오미자청 단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미 주인이 정해진 물건이다.

이 할아버지가 파란만장한 인생살이를 풀어 놓는다. 철원이 고향인 그는 연천에서 공병장교로 근무하고 베트남전쟁에도 참전했다. 나름 삶과 건강에 자신을 가질 무렵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쳤다. “나이 30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죽으러 들어왔어. 산나물 뜯고 약초 캐며 미음과 우유로 버텼는데, 6개월 지나니까 밥을 넘길 정도로 몸이 나아지더라고.” 지실가지마을이 할아버지를 살린 거나 마찬가지다.


산골마을은 이미 겨울 채비를 마친 듯하다. 곰순네 헛간과 창고에는 가지런히 다듬은 장작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다른 집 마당에도 장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장수에서, 아니 한국에서 가장 깊은 산골마을에는 이미 가을이 깊을 대로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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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실가지마을 주민은 주로 오미자 농사를 짓는다. 오미자 넝쿨이 자연스럽게 울타리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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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실가지마을 집집마다 장작이 산더미다. 깊은 산중이라 겨울 채비도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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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실가지마을 어느 집 저수조에서 맑은 물이 계곡으로 떨어지고 있다.

논개 유적에 그윽한 국화향

장수군이 가장 앞에 내세우는 인물은 주논개다. 1574년 장수에서 태어난 논개는 어머니와 함께 숙부에게 의탁해 살다 숙부의 사기행각으로 체포돼 장수관아에 수감된다. 당시 현감인 최경회로부터 누명을 벗은 모녀는 관비를 자처했다. 논개는 이때부터 최경회가 전직하는 곳마다 따라가 뒷바라지를 하다 1590년 담양부사 재직 시 후실로 들어갔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전투에 참가해 순국하자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해 순절했다. 19세 꽃다운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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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는 주논개의 고향이다. 읍내 양지바른 남산 자락에 그의 사당 의암사가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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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사당 의암사에서 의암호와 주변 공원이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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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사당 의암사 아래의 의암호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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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호의 논개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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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호 주변 공원은 이달 말까지 국화거리로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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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사당 인근 장수누리파크의 '레드푸드'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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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누리파크에서 운영하는 동물 모양 숙소.

그가 태어난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 생가가 복원돼 있고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했다. 읍내에는 그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의암사’라는 사당을 짓고 일대를 정비해 놓았다. 언덕배기 사당에서 잔잔하게 호수(의암호)가 내려다보인다. 호수 주변 산책로에는 요즘 국화꽃 향기가 그윽하다. 군에서 이달 말까지 일대를 국화거리로 운영한다. 바로 옆 장수누리파크에는 각종 동물 형상으로 지은 숙소가 눈길을 끈다. 사과와 토마토, 쇠고기 등 이른바 장수 ‘레드푸드’ 조형물이 세워진 공원에도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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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장수군 장안산 주변 여행 지도. 그래픽=강준구 기자

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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