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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사라지는 목욕탕, 원정 떠나는 사람들…“아픈 다리 원없이 담가봤으면”

[아무튼, 주말]

코로나까지 덮쳐 폐업 속출

‘목욕 원정’ 떠나는 사연


“남들 맨날 하는 목욕이 내한텐 일이다 일!”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에 사는 송옥선(86)씨는 열흘에 한 번 왕복 36km ‘목욕 원정’을 떠난다. 지난 8일 새벽에도 송씨는 목욕 바구니를 들고 추풍령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아침 7시 5분에 출발하는 첫차에 올라 이웃 동네인 경북 김천까지 40분을 달렸다. 김천역에 내려 10여 분 걸어야 목욕탕 간판이 보인다. 그나마 송씨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목욕탕이다. 목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반나절이 꼬박 지난다. “동네 목욕탕이 한날한시에 없어지뿠다. 요즘 같은 겨울엔 추워가 집에서 씻을 엄두 나긌나. 목욕탕이라도 가야지. 어차피 갈 거면 아침에 가야 된다. 낮에는 물 탁해서 못쓴다.”


씻는 일조차 고통인 이들이 있다. 목욕탕이 사라진 동네 주민들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0년 9950곳이던 목욕탕이 2020년 들어 6439곳으로 35.3%가량 줄었다. 인구 감소로 수요가 줄고, 고급 사우나에 밀려난 데다, 코로나까지 덮쳐 동네 목욕탕이 설 자리를 잃었다. 추운 겨울에는 목욕탕 없는 동네 사람들 고통은 배가 된다. 주거 시설이 열악해 온수가 나오지 않거나, 실외나 다름없는 개방된 공간에서 씻어야 하기 때문이다.


목욕탕이 사라진 동네 주민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충북 영동군에는 약 4만5000명이 살지만 목욕탕은 3곳뿐. 현재 운영 중인 곳도 경영난을 이유로 문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부산 남구 소막마을은 재개발 사업으로 마을 목욕탕이 동시에 사라졌다. <아무튼, 주말>이 목욕탕이 없어 고통을 호소하는 현장을 찾았다.


◇ 택시 타고 목욕 원정 가는 사람들


부산 남구의 소막마을은 3년 전 동네 목욕탕 3곳이 동시에 사라졌다. 소막마을은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정착해 생겨난 마을이라, 지금까지도 샤워 시설이나 온수 장비를 갖추지 못한 주택이 많다. 이곳에서 태백상회를 운영하는 유우원(87)씨는 인근에 사는 아들이 출근하지 않는 날만 기다린다. 멀리 떨어진 목욕탕까지 태워 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이다. “목욕 바구니 들고 버스 타고 내리려면 힘드니께. 주말에야 아들한테 데려다 달라 하는데, 눈치도 보이고. 아들 기다린다고 한 시간 넘게 서있기도 하고 그랬제.”


설 대목에 씻지 못한 주민도 많다. 주민 이옥연(82)씨는 “설날이 뭐 별건가 싶다가도 옛날처럼 마을에 목욕탕 있으면 대목 앞두고 목욕재계라도 하고 올 텐데, 연휴 지나고서야 동네 친구 3명 겨우 모아서 택시 잡아서 씻고 왔다”고 말했다. 버스를 타고 목욕탕에 가던 중 낙상 사고를 당한 노인도 있다. 최정례(88)씨는 “지난주에 목욕탕 앞에서 넘어져 허리를 다쳤다”며 “멀리까지 버스를 타고 가니 힘이 빠져서…. 부를 사람도 없고 얼마나 서럽던지” 하며 혀를 내둘렀다.


이곳 소막마을 목욕탕의 영업이 중단된 것은 재개발 사업 부지에 포함된 탓이다. 이정은 남구주민대회 정책위원장은 “재개발과 영업이익 감소로 목욕탕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이건 단순히 씻는 문제를 넘어 어르신들의 위생과 주민 복지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라며 “고령층 거주 비율이 높은 원도심이나 다른 구에서 구립 목욕탕을 짓는 것처럼 지자체에서 제대로 된 목욕탕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아궁이 불 때고 석유난로 켜야 씻는다


수도꼭지만 돌리면 뜨거운 물 콸콸 나오는 아파트와 달리, 목욕하려고 물을 끓여야 하거나 공간이 좁아 씻을 수 없는 집에 사는 주민도 많다. 소막마을 조을순(87)씨 집은 대문과 방 사이 공간이 주방, 세탁실이자 욕실이다. 성인 2명도 채 서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공간에 문틈으로 찬 바람이 밀려든다. 조씨는 초겨울까지 이곳에 쪼그려 앉아 씻었다. 플라스틱 그릇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찬물과 섞어 몸을 닦았다고 했다. 조씨는 “뜨거운 물에 들어가야 무릎과 허리 아픈 게 그나마 풀리는데, 집에선 웅크려 앉아 겨우 닦기만 할 뿐”이라고 했다.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에 있는 주택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주민 백모(59)씨는 마당에 있는 아궁이에 불을 땐다. 솥에 물을 끓여 집 안에서 씻고자 함이다. 집안 다용도실에서 석유난로를 틀고 데운 물로 4인 가족이 번갈아 가며 씻는다. 백씨는 “3~4일에 한 번씩 씻기도 힘들다. 따뜻할 때는 그나마 자주 씻을 수 있어 나은데, 동네 목욕탕 사라지고 나니 겨울이 더 길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오진손(82)씨는 “멀리까지 나가야 하는 데다 코로나가 무서워 2년째 목욕 가는 건 아예 포기했다”고 했다.


지자체가 목욕 시설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했지만 진척이 없거나 이용도가 낮은 상황이다. 영동군은 추풍령면 주민을 위해 2020년 행복목욕탕을 건립했지만 아직 민간 위탁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부산 남구는 소막마을 주민공동체센터에 샤워 시설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용 시간이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30분으로 짧고, 샤워기만 있을 뿐 몸 전체를 담글 수 있는 탕이 없어 주민 이용도가 낮았다.


◇ 차라리 호텔 스파로 간다?


서울에서도 동네 목욕탕은 사라지고 있다. 특히 코로나 확산세가 심했던 서울에서는 2019년 940곳에서 2년 만에 768곳으로 줄어들었다. 목욕 자체를 즐기는 노년층과 달리, 청년과 장년층은 목욕탕에서 먹고 즐기는 경향이 강하다. 방모(29)씨는 “목욕과 사우나는 요박(요구르트+박카스), 포박(포카리스웨트+박카스) 만들어 먹는 재미로 가는데, 코로나 때문에 먹기가 꺼려진다”고 했다. 달 목욕권을 끊는 이들에게는 ‘목세권(목욕탕+역세권)’에 거주하는 것도 중요한 요건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목욕탕 방문 횟수도 크게 줄었다.


동네 목욕탕보다는 차라리 호텔 스파에 가겠다는 이도 늘었다. 비싼 돈 주고 가는 호텔이 방역에 더 철저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지난 주말 서울 송파의 한 호텔 스파에 다녀온 김모(25)씨는 “코로나 시국에는 비싸지만 프라이빗한 호텔 스파가 낫다고 생각했다”며 “사람들 마주칠 염려도 적고 편안히 몸을 담글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시그니엘 서울, 그랜드하얏트제주 등 호텔 스파는 3만원대부터 20만원을 넘는 비싼 금액에도 코로나 이후 이용객이 늘었다. 시그니엘 서울은 2019년 대비 매출이 15% 늘었다.


◇코로나까지 덮쳐 폐업 속출


대중목욕탕이 감소하기 시작한 건 1990년 후반 아파트가 대량 보급되고 집 안에서도 간단한 목욕이 가능해졌을 때다. 동네 목욕탕이 사라지는 대신 고급 사우나와 대형 찜질방이 수요를 흡수했다. 부산 남구에서 S목욕탕을 운영하다 폐업한 관계자는 “우리는 재개발로 폐업했지만 그 전에도 아파트 사는 단골들은 벌써 딴 데로 가버리고, 마을에 남은 노인들이 주 고객이었다”고 했다. 한국목욕업중앙회 부산시지회 박재기 사무국장은 “아무리 작은 동네 목욕탕이라도 개업하려면 시설 비용이나 관리비 등으로 10억원 넘게 든다. 손님이 준다고 관리 비용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영업을 할수록 손해니 휴업하거나 영업을 중단하는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 확산 이후에는 목욕탕발 코로나 감염이 늘면서 수요가 더욱 줄었다. SKT의 빅데이터 설루션 ‘지오비전’이 분석한 내용에 따르면 대중목욕탕은 코로나 이전인 2019년 10월에 비해 2021년 10월 3.2% 감소해 매장 수가 감소한 업종 10위권에 들었다. 충북 영동군에서 H목욕탕을 운영하다 최근 영업을 중단한 관계자는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아예 발길을 끊었고, 50~60대 단골들도 뜸해졌다”며 “탕 안에서 마스크를 써 달라 일일이 안내하기도 힘들고, 영업 수익보다 관리비가 더 들어 폐업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소막마을 골목을 지나는 이옥연씨의 걸음은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왼 다리가 시리고 저려 병원에 갔지만,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었다. “60년 전 북항 7부두에서 일하던 남편한테 시집와서 쭉 여기 살았지. 혼자 되고는 동네 사람들이랑 목욕탕에서 뜨신 물에 지지는 낙으로 살았는데, 몇 년 전 한날한시에 목욕탕이고 집이고 다 뜯어 버리데. 근데 우짤기고. 나이 든 사람이나 목욕탕이나 낡은 게 죄인이지.”


[영동·부산=신지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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