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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조선일보

열 발가락으로 세상을 부는 남자, 바람의 땅 제주를 홀린다

독일 호르니스트 펠릭스 클리저


"누구에게나 24시간이 주어져요. 그 시간 동안 다들 최선을 다해 밥 먹고 일하듯 저는 호른을 붑니다."


여기, 열 손가락이 아닌 열 발가락으로 세상을 부는 남자가 있다. 펠릭스 클리저(26)는 발가락으로 연주하는 독일 호르니스트. 8일 오후 '바람의 땅' 제주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지난해 밴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2018 제주국제관악제'의 개막 공연을 책임진다. 제주연합윈드오케스트라(지휘 이동호)와 모차르트의 호른 협주곡 2번을 선보인다. 하루 먼저 중문 해변에서 만난 그는 "탁 트인 바다를 보니 열 시간 비행이 상(賞)처럼 느껴진다. 올해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제주에 온 것"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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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후 소나기 퍼붓는 제주 중문 앞바다에서 만난 펠릭스 클리저가 악기와 한 몸이 됐다. "이렇게 태어난 건 내 운명. 한 번도 원망해본 적 없어요. 호른에 꽂혀 연주자가 됐고, 돈까지 버니 난 억세게 운 좋은 남자예요." /펠릭스 클리저 제공

태어나 보니 두 팔이 없었다. 먹고 입고 글씨 쓰는 대부분의 일상을 열 발가락으로 해냈다. 열일곱에 명문 하노버 국립음대에 입학한 호른 수재. 2013년에는 베를린 클래식 음반사에서 데뷔 앨범 '꿈'을 내 찬사를 받았고, 이듬해 발표한 두 번째 앨범 '비밀의 초대'는 에코 클래식 음반상을 거머쥐었다.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호른 주자로 이름을 날릴 때, 베를린 필 수석지휘자였고 지금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장인 사이먼 래틀과 협연했다. 2010년엔 수퍼스타 스팅과 팝 공연을 하는 등 정상의 호른 연주자로 날아올랐다. "래틀도, 스팅도 제 팔에 대해선 일절 말하지 않았어요. 음악가 대 음악가로서 음악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요."


네 살 때 바닥에 뒹구는 호른을 보자마자 마음을 뺏겼다. 일반인은 왼손으로 키를 잡고, 오른손은 관 안에 넣어 음색을 조절하는데 그는 오른손 대신 왼발로 음정을 맞추고, 굳은살 박인 입술과 숨으로 음 빛깔을 바꾼다. 오른발은 악기 받침대를 고정하는 데 쓴다.


나팔꽃 모양의 금관악기 호른은 서양에선 사냥의 시작을 알렸던 도구. 까다로운 악기이지만 거침없이 쭉 뻗는 사운드가 속이 뻥 뚫리는 쾌감을 안긴다. 그러나 클리저의 소리는 비 오는 날,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눈 감고 음미하는 촉촉한 소리에 가깝다. "부모님은 한 번도 저를 다그치지 않으셨어요. 늘 자유롭게, 뜻대로 살라고 토닥이셨지요." 열네 살 때 처음 시련에 부닥쳤다. 고음이 많아 튼튼한 심장, 두둑한 뱃심이 필수인데 체력이 따라가질 못했다. "하루에 서너 시간씩 운동에 매달렸지요. 마치 운동선수처럼."


"팔이 있고 없고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했다. 호른은 두 손으로 몸통을 들어올려 부는 악기. 팔이 없다면 "대신 떠받쳐줄 지지대를 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손재주 뛰어난 장인을 만나 호른을 고정할 조립식 받침대를 만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건 바람. 입술 사이로 바람을 빨아들여 근육과 조화를 이룬 다음 제대로 내뱉을 때 좋은 소리가 난다. "늘 좋은 소리가 나진 않지만 100% 완벽해지려 노력하지요."


호르니스트 클리저의 생애 첫 무대는 다섯 살 때 그가 살던 동네의 허름한 학교 강당이었다. "딴 건 기억이 안 나는데, 끝나고 나서 '해냈다!'는 희열이 척추를 타고 온몸을 짜릿하게 휘감았던 기분은 잊히지 않아요. 그래서인지, 입술이 부르트고 다리가 저려도 그만둘 수가 없어요. 욕심 같아선 전 세계 모든 마을에 호른 소리가 울려퍼지게 하고 싶어요."



[서귀포=김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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