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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잡내 하나 없이 얼음처럼 청량하다, 물회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물회

서울 강남구에 있는 '서울물회'의 물회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물회란 어정쩡한 음식이었다. 술과 함께 먹기도 애매했다. 식사라고 생각하기엔 회가 많았다. 회 백반도 먹는 부산 사람이지만 회를 물에 담가 먹는다는 건 어색했다. 어릴 적 부산에서 동해남부선 기차를 타고 처음 갔던 속초에서는 국물이 찰랑거리는 물회를 팔았다. 더운 바람에 얼음이 녹을세라 급하게 마셨던 물회는 평양냉면을 처음 먹었던 때처럼 어린이에게는 그저 어른에게 양보하고 싶은 맛이었다. 그보다는 가을마다 전어를 썰어서 양파, 파 같은 채소와 함께 초장을 쭉 짜넣고 비벼 먹는 것이 익숙했다.


하지만 물회 맛을 알기 위해서는 단지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이었다. 아침 바람에 한기가 걷히면 물회 생각이 났다. 고백하자면 겨울에도 물회를 자주 먹었다. 대치동 언덕길에 있는 ‘서울물회’라는 집 때문이다. 휘문고 후문 바로 맞은편에 있는 ‘서울물회’는 점심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자리 잡기가 쉽지 않다. 짧은 직장인 점심시간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이들을 보면 ‘이 집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결기마저 엿보였다. 이미 자리를 차고앉은 사람들은 연령과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회사 이름이 박힌 유니폼 차림의 중년 남자도, H 라인 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자도, 수조 안 가득 차 있는 해산물처럼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이 집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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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에 있는 '서울물회'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자리에 앉자마자 깔리는 반찬을 보니 땡볕에도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일단 그릇부터가 달랐다. 하나하나 손으로 빚은 듯 투박하지만 무겁고 전복 껍데기처럼 색이 오묘한 사기를 반찬에도 썼다. 이 집은 포항식 물회와 속초식 물회 두 종류를 모두 했다. 속초식은 마냥 빨간 국물이 있는 평범한 종류가 아니었다. 우선 쪽파와 깨를 뿌린 하얀 회가 위에 올랐고 그 밑으로는 얼음이 하얗게 쌓였다. 이 그릇 안에 어린 시절 맨손이 빨갛게 되도록 가지고 놀던 눈송이가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언덕을 오르며 고개를 들면 눈앞을 가로막던 설산(雪山)이 있었다.


먼저 위에 올린 생선회를 담백하게 건져 먹었다. 그다음에는 숟가락으로 얼음과 회를 슬슬 휘저었다. 저 밑에서부터 빨간 기운이 서서히 번져 나갔다.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선명한 붉은색이 그릇 안에 가득해지니 그때는 물회라는 이름답게 숟가락으로 퍼먹는 것만 남았다. 포항식은 반대로 국물도 얼음도 없이 김가루와 오이와 배를 가득 썰어 양념장과 함께 회 위에 올려냈다. 마치 비빔국수를 먹듯이 이 모든 것을 비비고 같이 낸 깻잎과 돌김에 올려 쌈을 싸 먹었다.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은 얼음을 먹는 것처럼 청량했고 회에는 희미한 잡내도 없었다. 들깨를 살짝 넣은 미역국은 고소한 맛이 매콤한 물회 뒤에 배경처럼 서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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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에 있는 '서울물회'의 물회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도저히 서울 사람이 낸 음식 같지 않아 슬쩍 물으니 주인장은 영덕 출신이었고 매일 두 번씩 포항, 구룡포에서 회를 받아쓴다고 했다. 참가자미를 절반, 나머지는 마치 커피 원두 블렌딩을 하듯 잡어를 섞어 낸다는 설명이 별것 아니라는 듯 이어졌다. 한 가지만 쓰면 맛이 단순하여 질린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아삭하고 단맛이 나도록 채소를 써는 두께도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세상에 쉽게 되는 일이 없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회를 어느 정도 먹고 나면 밀면을 먹을 때처럼 차가운 국물을 따로 청해 부었다. 이제 옆에 놓인 흰쌀밥을 술술 말아서 숟가락으로 떠먹는 일만 남았다. 선연한 빨간 국물도 간이 세지 않고 매운맛도 과하지 않아 훌훌 떠넘기기 수월했다. 이쯤 되니 ‘밥을 줄이기로 했다’는 선언은 맥주 거품처럼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빈 그릇에 부딪히는 숟가락 소리만 남았다. 이것만으로 아쉬워 시킨 대구전은 노란 계란물이 고르게 묻었고 살점이 큼지막하여 ‘전’이란 이름을 가질 만했다.


밖으로 나오면 학생들이 농구를 하며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고향 친구들이 모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회를 비비고 밥을 말았다. 맞아. 그때는 그랬다. 점잖게 앉아 ‘으음’ 하고 드문드문 젓가락질을 하며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것저것 듬뿍 넣고 비벼 밥숟가락 가득히 입에 넣었다. 모자라면 내 것을 대신 퍼주기도 했다. 큰 그릇 가득 회를 쌓아주는 이 집 주인장의 마음은 그때 그곳 사람들을 닮아 있었다.

#서울물회: 물회 2만2000원, 대구전 3만5000원.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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