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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by 예스24 채널예스

남자와 여자가 삿포로 도로를 질주하오

우리의 세계를 더럽히는 그녀

자신과 잘 맞는 도시는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알아챌 수 있다고 '그 여자'는 말했다. 그걸 뭐라더라. 영혼의 도시? 뭐 그렇게 표현했던 거 같다. 자유로운 사고와 개성 넘치는 외모, 이에 더해 길거리에 떨어진 쓰레기 즈음 신경쓰지 않는 시크함 혹은 무신경함을 겸비한 프랑스 파리가 자신에게 그런 곳이라 했다.

 

오래 전에 잭 니콜슨이 로맨틱 작가, 멜빈 유달 분으로 연기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란 영화를 보면서 나는 평화를 느꼈다. 내용이야 뻔한 로맨틱 코미디고 나를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주인공의 태도였다. 강박증 환자인 주인공은 인도에 이어져 있는 선이 끊어지면 더 이상 걸을 수 없고, 비닐 장갑을 끼지 않고는 애완견도 만지지 않는 자신만의 룰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괴함보다는 완벽에 가까운 아름다움으로 보였다.

 

한여름의 더위를 피해 삿포로에서 두 달간 머물기로 했다. 완벽한 계획도시를 꿈꾸며 만들어진 이 도시는 드넓은 평지 위에 반듯한 격자 마냥 도로가 정비되어 있다. 또한 사람과 자전거가 ‘좁은’ 인도 위를 함께 이용하지만 완벽한 중앙 통제를 따라 선로 위를 달리는 기차 마냥 서로의 영역을 확실히 피해 걷거나 달리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기 좋은 환경이라 도착하자마자 한 대씩 샀다. 그 아름다운 룰에 나도 자연스럽게 스며들리라 마음을 먹고 페달 위에 발을 올렸다.

 

내가 앞서고 ‘그 여자’가 졸졸 따른다. 줄을 맞춰 따라 오면 좋으련만 꼭 어깨 하나쯤 밖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다. 마주 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룰을 벗어난 그 여자의 행동에 놀라서 우물쭈물한다. 앞서는 나는 ‘스미마센 (실례합니다)’이 아니라 ‘고메나사이 (죄송합니다)’를 외치고 지나야 할 판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신호대기를 위해 정차하면 그녀는 어김없이 인도 한복판에,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피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길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서버린다. 멈춰 설 때마다 주의를 주지만 되려 화를 낸다.

 

별다방에서의 일이다. 각자 테이블 하나씩을 차지하고 일을 하고 있던 도중 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와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 이곳은 커피를 마시는 자리이니 컴퓨터로 하는 작업은 저기 앞에 있는 긴 테이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도록 ‘우리가 준비한 자리’로 움직여 달라는 이야기였다. 이런 작은 부분까지도 룰을 만들어 지키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그 여자는 그들의 세상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던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가장 동경하는 도시가 프랑스 파리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파리로 여행을 다녀오면 마음에 상처를 입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크함 혹은 무신경함은 일본인으로서는 받아들을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나는 2년 동안이나 ‘그 여자’와 함께 세계를 여행했다. 하지만 영화 속 멜빈과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계에는 더 이상 오지 않겠다. 빈틈없는 룰로 이루어진 이 아름다운 세계를 그 여자의 무신경함이 더럽히는 꼴을 볼 수 없으니 말이다.

남자와 여자가 삿포로 도로를 질주하오

자전거, 사람, Runner 그리고 자동차까지 모두가 줄을 맞춰 아름답게 움직이는 삿포로. 이 풍경 속에서 유독 튀는 단 한 사람, 그 여자.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남자

엄격한 잣대에 의해 움직이는 경직된 세계에서 그 남자는 평온해 보였다. 그 세계에 녹아 들지 못하고 질서를 방해하는 나는 그에게 모난 돌이다. 길을 걷다 신호등이 멈추는 빈도 수만큼이나 잦은 잔소리를 퍼붓는 통에 삿포로에 도착하고 한 동안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삿포로가 그에게 안온함을 주었다면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마지막 일본 여행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서 뒷사람의 진로에도 신경을 쓰는 사람이 그이다. 자전거를 타고 연신 뒤를 돌아보며 그들의 진로를 챙기기에 바쁘다. 앞사람은 자기 몫만 다하면 된다. 그러니까 갑자기 멈춰 버린다든가, 방향을 급하게 튼다든가 하는 돌발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뒤에 오는 사람은 흐름에 맞춰 자신의 길을 알아서 간다. 오히려 앞사람이 뒤를 신경 쓰는 것이 부자연스럽다.

 

바둑판처럼 질서 정연하게 구획을 만들어 놓은 삿포로는 계획도시로 오르막과 내리막이 없어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에 좋다. 인도는 ‘널찍’하고 인구 밀도도 낮아서 도시의 혼잡함과는 거리가 멀다. 질서정연함이 체득되지 않은 나로 인해 도시 전체가 엉망이 될 일은 없다는 의미이다. 뒤에 사람의 진로는 그 사람의 과제로 남겨둬도 괜찮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남자가 우물쭈물 다른 사람을 배려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로가 길 한복판에서 엉켜버린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인도의 흐름에 맞추지 못하고 과도하게 상대방을 배려한 탓이다.

 

일본인의 친절함을 마주할 때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죄송하다’와 ‘감사하다’를 외치는 저 얼굴 뒤로 어떤 의뭉스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피렌체처럼 상대방이 이탈리아어를 할 줄 모른다고 인상을 쓰거나 뉴욕처럼 알아듣거나 말거나 속사포 영어를 떠드는 편이 훨씬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일까? 그 남자가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 사람들의 이런 성격과 자신이 비슷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낯선 사람에게 조차 친절하고 조심성 많고 질서 정연한 모습 속에서 남자는 평온함을 느낄 것이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 뱉는 말에 능숙한 남자이니 그럴 만도 하다.

 

남자와 함께 일본을 처음 방문한 건 2013년 봄이다. 걱정이 많은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고자 세계여행의 시작인 도쿄를 함께 여행했다. 훗날 남자는 자신의 책에서 엄마를 ‘무법자’라고 표현했는데 지하철이나 도로에서 일본인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엄마가 그렇게 싫었다고 한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 미움의 대상이 엄마에서 나로 바뀔 거라는 사실이, 그 누구도 이 사람의 기준에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남자와 여자가 삿포로 도로를 질주하오

꽃밭의 색의 배열까지 고민해서 구획해 놓은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현기증이 다 난다.

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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