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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by 뉴스1

오름·해안선·초원…'풍경의 뷔페' 속 놀멍 쉬멍 걸으멍

광치기해변-성산일출봉-지미봉-해녀박물관 19.5㎞…걷기의 유토피아

발길 닿는대로 걷는 '동네 골목' 올레길…몸도 정신도 탈탈 털린 '바람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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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과 광치기 해변의 초록 암반. 올레길 1코스 다운, 제주도의 대표 풍경 중 하나.

우리나라 최고의 여행지로, 세계적으로도 '핫 아일랜드' 중 하나로 제주도를 꼽는다. 제주는 '물 건너(濟) 동네(州)'라는 뜻이다. 본래 독립국인 탐라국(耽羅國/섬나라)이었다가 1100년쯤 고려에 통합되고, 1200년쯤부터 제주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제주도는 바다 밑에서 용암이 솟구치며 생긴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땅이다. 이후에 땅에서도 화산활동이 일어나 수많은 오름이 생기면서 용암이 분출되고, 이들 용암이 흐르다 굳고, 이후 파도와 빗물에 의해 부서지고 깎이면서 오늘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과학적으로는 화산폭발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전설로는 옥황상제의 딸인 설문대할망이 바다에서 흙을 퍼서 제주도를 만들었고, 치마폭에 흙을 날라 한라산을 만들었으며, 이때 치마의 뚫린 구멍으로 흙이 새서 368개의 오름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과학보다 전설을 더 믿고 싶다.


제주에는 너무도 많은 풍경이 있다. 편평한 구릉에 우아하게 솟은 한라산, 너른 벌판에 봉긋봉긋하게 솟은 오름과 굼부리(분화구)들, 숲이 얽히고설켜 비밀의 숲이 된 곶자왈, 지하의 동화나라 용암동굴, 말과 노루가 내달리는 초원, 현무암 밭담으로 둘러쳐진 초록 밭, 노란 모래와 검정 현무암, 하얀 파도가 때로는 평화롭게 때로는 거칠게 그려내는 바닷가 풍경.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파란지붕 빨간지붕 촌락들과 새롭게 들어선 예쁜 카페들과 앙증맞은 간판들. 그런 제주의 다양한 자연과 문화와 언어를 접하며 걷는 길이 올레길이다.


올레는 제주도 말로 '동네 골목길'이다. 제주도의 바닷가를 뺑 두르는 21개 순환코스 342㎞와 순환코스에서 들락날락하는 95㎞를 합쳐 총 27개 코스 437㎞에 이른다. 완주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지만, 시간 되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놀멍(놀다가), 쉬멍(쉬다가) 하는 것이 골목길 올레의 사용법이다. 첫 구간인 1코스 일부와 마지막 구간인 21코스를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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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1 최수아 디자이너

◇ 1코스; 광치기해변-성산일출봉-종달리 10㎞ "성산일출봉에 올라 광활한 풍경에 감동하고 가랑비, 진눈깨비, 우박을 맞으며 종달리로."

제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넘게 도시, 전원, 오름, 마장(馬場) 풍경을 통과해 광치기 해변 입구에 내린다. 햇빛과 파란 하늘이 멀쩡했다가, 구름이 몰려왔다가, 빗방울을 뿌렸다가, 다시 햇빛이 반짝하는 '제주도 날씨'가 5분 간격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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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치기해변의 노랑・검정 모래와 민트색 바다. 썰물 때 드러나는 초록 암반이 광야 같이 넓어서 광치기해변이라 부른다.

억새가 빼곡한 모래언덕에서 겨울바람을 맞으며 올레 1코스의 첫 풍경을 바라본다. 이곳을 1코스로 삼은 이유는 성산일출봉 때문일 것이다. 제주도를 홍보하는 광고물에 가장 많이 나오는 사진이 성산일출봉이고, 그 밑에 광치기 해변이 길게 펼쳐져 있다. 광치기란 썰물 때 드러나는 넓은 암반이 광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마침 구들장처럼 평편한 바위들이 모래밭과 바닷물 사이에 드러나 있고, 그 위에 초록 이끼들이 융단처럼 깔려있다. 은빛 억새와 노랑·검정 모래밭, 검은 암반에 초록 이끼, 엷은 하늘색 바다에 하얀 포말, 회색 구름과 옅은 파랑색 하늘, 그리고 성산일출봉의 진녹색 윤곽... 제주 동쪽 해안의 칼라풀한 풍경에 경탄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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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 앞 광치기해변의 푸른 바다에서 말달리는 풍경.

광치기해변에서 성산일출봉 방향으로 나가는 길목에 '성산읍 희생자 위령비'라는 비석이 있어 내용을 들여다보니 4.3사건에 대한 것이다. 오랫동안 말해지지 못했던 비극이 이 아름다운 곳에서 벌어졌다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었다니, 같은 동족끼리 그럴 수 있었다니... 풍경을 보고 설렜던 가슴이 가라앉으며, 그 풍경이 다르게 읽혀진다. 기념비에 이렇게 쓰여 있다. "과거를 잊고 산다는 것은 곧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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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 오르막길의 바위. 화산재가 쌓여 굳을 때 빗물에 의해 깎여 만들어진 모습. 이 바위들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성산일출봉의 육중한 몸체에 다가서니 평일인데도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가득하다. 관광객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다. 각진 바위가 성(城)처럼 에워싼 성산(城山)이고, 제주도에서 가장 동쪽에 있어 일출을 가장 먼저 맞는 일출봉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아픈 역사가 있다. 절벽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커다란 구멍이 숭숭 패어 있다. 일본군이 우리 백성을 동원해 만든 군사시설이다.


입장료 5000원을 내고 가파른 계단을 20분쯤 낑낑 오르면 분화구가 있는 정상이다. 분화구의 타원형 테두리를 바위들이 둘러 왕관처럼 보이고, 움푹한 굼부리가 초원처럼 다듬어진 신비스런 풍경이다. 멀리 바라보는 부드러운 구릉과 볼록볼록한 오름들과 오밀조밀한 마을들과 휘어진 해안선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경관은 정말 비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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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 정상 분화구. 예전에 분화구 안에서 콩, 수수 등의 작물을 길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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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윗 사진의 아래 성산읍, 왼쪽 위 여러 개 오름, 오른쪽 위는 올레길 21코스의 지미봉. 2장의 사진처럼 5분 만에 한번씩 날씨가 바뀐다.

제주도 날씨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변덕이 더욱 심하다. 찬 바람에 귀가 얼얼하고, 진눈깨비가 날리고, 곧 우박이 쏟아진다. 추워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동남아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는 순간에만 활짝 미소를 짓고 나서,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하산한다.


하산해서 바라보는 성산일출봉은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산으로 보인다. 우도를 바라보는 전망대에 선다. 소가 앉아 있는 형상의 '소섬'이라는데, 이 방향에서는 기다란 뱀처럼 보인다. 우도에는 전형적인 제주도의 촌락과 전원이 있고, 사이판이라고 부르는 깨끗한 모래와 민트색의 얕은 바다가 있다. 자전거를 대여해서 한바퀴 도는 슬로 여행에 좋은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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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 북쪽 사면의 위용. 우도(牛島). 소가 앉아 있는 모습이어서 '소섬'인데, 여기서는 뱀처럼 기다랗게 보인다.

해안선을 따라가는 성산항까지의 올레길 입구에 이생진 시비가 있어 꼼꼼히 읽어볼 만하고, 중간 중간의 카페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우도 풍경도 멋지다. 오늘처럼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그 풍경은 서정적이다. 맹렬한 찬바람을 맞으며 성산항에 이르니 비린내가 훅 불어온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후각이 둔해졌었는데, 이 비린내가 후각을 복원시켰다는 유쾌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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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에 핀 12월의 야생화. 왼쪽 섬갯쑥부쟁이, 가운데 갯국화. 오른쪽 유카는 원예종.

기다란 교량을 넘어가기 직전에 한껏 쏟아진 가랑비가 패딩을 흥건히 적셨지만, 교량을 지나면서 마른 바람이 불고 햇빛이 비치니, 교량을 건넌 뒤의 패딩은 말끔하게 말랐다. 그렇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어느새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눈뜨기 어려운 진눈깨비 바람이 몰아쳤고, 얼굴이 따가워 손바닥으로 감쌀 정도의 우박을 맞으며, 고개를 수그리고 걸어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해변의 빨랫줄에 오징어를 줄줄이 너른 목화휴게소를 지나, 종달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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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풍경, 카페 광고판. 왼쪽의 지미봉을 바라보는 핫 플레이스. 목화휴게소 앞의 해변도로에 걸린 준치. 오징어와 한치의 중간 맛이라 해서 준치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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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1 최수아 디자이너

◇ 21코스; 지미봉-토끼섬-제주해녀박물관 9.5㎞ "지미봉에 올라 푸르른 바다와 초록빛 전원을 조망하고, 해안 올레길에서 제주 칼바람을 제대로 마주하다."

종달리는 좋은 동네다. 종달새를 연상하게 하는 예쁜 이름이기도 하고, 종점에 이르렀다(終達)는 이름뜻이 올레길 전체의 종점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깨끗한 거리의 돌담 안에 낮은 지붕과 엎드린 자세의 가옥들, 오래된 울타리에 핀 빨간 동백꽃, 그리고 블로그에서 평가가 좋은 카페와 음식점이 여러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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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봉 정상에서 바라본 전망. 멀리 성산일출봉, 중간에 민트색 바다, 가까이 초록색 밭들의 모자이크.

기자는 올레길을 거꾸로 가고 있기 때문에 종달리를 21코스의 시점으로 삼아 지미봉을 오른다. 지미봉(地尾峰)은 '육지의 끝에 있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입구에서 약 400m의 가파른 오르막을 20분쯤 천천히 올라 정상에 서면, "아니, 이렇게 높이 올라왔나?" 할 정도로 높은 고도감을 느낀다. 그만큼 전망이 좋다. 특히 지나온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수십 ㎞는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한라산 방향으로 여러 개의 오름이 구름에 묻혀 있다. 산 아래로 바다에 접한 초록빛 농토들이 모자이크 무늬를 만들었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이 잘 진열된 장난감처럼 보인다. 유유하고 평화스러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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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무밭과 검정색 밭담, 그리고 굽이굽이 황토색 올레길.

지미봉을 내려오니, 한겨울 12월에 초록빛 밭 천지다. 커다란 무가 쑤욱쑤욱 올라오고 있는 무밭이다. 밭의 구부정한 경계마다 올려진 밭담을 유심히 관찰해본다. 작은 구멍 투성이의 검은 현무암들을 주섬주섬 쌓아올린 듯한데, 울퉁불퉁한 면끼리 짝을 맞추어 흔들리지 않게 하고, 돌과 돌 사이에 큰 구멍을 내 바람을 통하게 했다. 그러니 아무리 센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밭담을 굽이굽이 돌아서 해안도로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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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새. 하도리 해안에서 만난 진귀한 여행자. 주걱같은 부리로 갯벌을 저어 먹이를 찾아내 저어새라 부른다.

해안도로는 여전히 '바람의 도로'다. 하도리 철새도래지와 해수욕장을 통과해 토끼섬 인근으로 접어드니 바람은 더욱 세지고, 바람의 온도는 더 차가워진다. 오후 늦은 이 시간의 이 길에는 올레꾼이 거의 없다. 그러다가 누군가 다가와서 꾸벅 인사를 하며 지나쳤는데 고개를 수그리고 가느라 제대로 답례를 하지 못했다. 얼마나 미안하던지...


전신주를 부여잡고 바다를 바라보니, 바다 가운데에서 수십 개의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물보라를 날리는 모습이다. 그곳에서 불어온 바람이 장애물 없이 달려와 올레꾼의 몸을 휘청이게 한다. 코끝이 시큰하고 눈물이 맺히고 이마가 젖혀지는 맞바람을 거스르며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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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의 올레길. '해맞이해안도로'를 따라 가는 올레길에 칼바람이 몰아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 길에는 유독 '불턱'이 많다. 해녀들이 물질을 하기 전에 준비를 하거나 추위를 피하는 장소다. 그럴 만큼 바람이 세고 춥다.

올레길은 해변길 중간의 석다원(음식점)이나 별방진(別防鎭/왜군 침입에 대비했던 성)에서 내륙 쪽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바람이 잦아들 것이다. 그러나 고개를 수그리고 가느라 표지판을 놓쳤다. 그래서 이 엄청난 바람을 맞으며 계속 해안길을 따라 올라가 21코스의 시점인 해녀박물관에 도착했다. 날은 컴컴해졌고 몸은 얼었다.


몸을 녹이기에 가장 좋은 '올레 요리'는 해물라면이다. 꼬들꼬들한 면 위에 선홍빛 새우와 전복과 홍합으로 토핑을 했고, 주홍빛 국물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온다.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인다. 한라산소주를 곁들이지 않을 수 없다. 속이 뜨거워지고 이마에서 땀이 배어 나오며 몸이 풀린다. 제주시로 가는 버스를 타니 금방 졸음이 쏟아져 머리가 계속 차창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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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꾼들의 이모저모. 놀멍(놀면서), 쉬멍(쉬면서), 걸으멍(천천히 걷기)

오늘 기자의 올레길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단 하나의 풍경을 꼽으라면 그것은 성산일출봉도 지미봉도 아닌, 바로 바람이다. 칼바람이 일으킨 압도적인 풍경 속에서 몸도 정신도 바람에 탈탈 털렸고, 이러다가 바람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했다. 바람의 섬 제주도를 절절하게 체험한 하루였다.


제주도 올레길은 풍경의 뷔페다. 입맛에 맞는 구간을 택해 마음껏 제주의 풍경을 즐기고, 풍경의 요소가 되어 풍경이 시키는 대로 흘러가 보자. 가다 보면 그렇게 걷는 자신의 모습이 거기에 보일 것이다. 올레는 풍경을 순례하는 동시에 자기를 들여다보는 순례길이기도 하다.


신용석 기자 ​stone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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