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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by 매일경제

지상낙원을 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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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 생전 한 번은 꼭 가보자 다짐했던 세이셸도 그랬다. 지상낙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휴가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영국 윌리엄 왕세손의 허니문 여행지 등 수식어만 들어도 오금 저리는 세이셸에서 마라톤을 직접 뛰고 취재하면 어떻겠냐는 거짓말 같은 제안. 솔깃했지만 선뜻 가겠다고는 못했다. 학창시절 오래달리기 중도 포기자가 마라톤을? 불가능한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생각이 바뀌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검색창에 세이셸을 치고 스크롤을 한 번 내리는 순간, 아주 빠른 태세 전환이 이뤄졌다. '어머, 여긴 꼭 가야 돼!' 20인치 모니터로 보는 풍경이 이 정도인데, 실제는 얼마나 환상적일지 감히 상상도 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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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셸에서는 매년 2월 마지막 주 일요일 천국을 달리는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평생 가볼까 말까 한 나라에서, 평소 생각도 안 해본 도전을 하다니. 여행 중 그럴 때 있지 않나. 일상 속 나와는 다른 자아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의외의 일을 하게 되는 경우 말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 영감을 얻고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이 여행의 묘미라는 지론을 이번에도 믿기로 했다. 가자, 세이셸. 달려보자, 세이셸!


지난 2월 24일 열린 세이셸 에코 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전 세계 58개국에서 4000여 명이 몰려왔다. 세이셸 에코 마라톤은 세이셸 3대 이벤트 중 하나다. 매년 4000~4500명이 마라톤에 참가하는데 그중 약 20%가 외국인이다. 세이셸을 대표하는 이 행사를 만든 주인공이 한국인이라면 믿겠는지. 올해로 12회를 맞는 이 대회는 정동창 세이셸 명예총영사가 시작했다. 정동창 영사는 국민 건강과 단합, 외국인 관광객 유치, 세이셸 국가 이미지 제고 등을 이유로 세이셸 정부에 대회를 제안하고 1회부터 10회까지는 주최, 11회 이후부터는 후원만 한다.


출전한 종목은 남녀노소 축제처럼 즐긴다는 5㎞. 24일 오전 4시 30분. 전날 사놓은 빵과 커피, 과일로 배를 채우고 대회가 열리는 보발롱 해변으로 향했다. 6시 30분 출발지에 집결했는데, 웬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12번 대회를 치르면서 행사 내내 폭우가 쏟아진 건 처음이라고 했다. 빗방울은 꽤 굵었다. 속 모르고 점점 더 굵어지는 빗방울에 사기가 잔뜩 꺾였다. 누구는 쨍하게 맑은 날보다 비 오는 게 낫다고 했지만 온몸이 비에 흠뻑 젖은 뒤 느껴질 찝찝함에 출발 전부터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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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이 어우러진 그림 같은 세이셸의 바다.

주최 측은 오전 7시 예정돼 있던 하프마라톤과 마라톤 출발을 30분 늦췄다. 자연스레 5·10㎞ 출발도 늦어졌다. 빗방울이 잦아들기를 기도했지만 도통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7시 30분, 하프마라톤과 마라톤 출전자들이 출발하고 단상에 에어로빅 강사가 올라왔다. 사람들은 거센 빗방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노래를 따라부르며 동작을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콘서트장에 온 것처럼 흥겨워 몸이 절로 들썩거렸다. 출발에 앞서 사회자가 단체 참가자들을 호명하는 것도 유쾌했다. 회사와 학교의 이름을 차례차례 부르자 환호성이 터졌다. 마지막으로 자원봉사자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달리기가 시작됐다.


"절대 부담 갖지 마세요. 해변을 바라보며 산책하듯 걸으시면 됩니다." 김빛남 세이셸 관광청 한국사무소 소장의 말이 딱 맞았다. 시작을 알리는 웅장한 총소리를 뒤로하고 사람들은 느릿느릿 걸어나갔다. 출발 후 200m쯤 산책로가 끝나고 아스팔트 찻길에 접어들면서 속도를 내는 사람들이 생겼다. 성난 파도가 몰아치는 세이셸 바다를 옆에 끼고 힘차게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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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섬 보발롱 비치를 따라 펼쳐지는 마라톤 루트. [사진 제공 = 세이셸관광청]

길은 바다와 가까웠다. 산책로 이후 찻길도 해안가에 바투 붙어 있었다. 달리다가 더우면 바다로 뛰어들어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고 한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길은 오르내림을 반복했다. 힐튼 리조트 부근 반환점을 돌아 출발지인 보발롱 해변으로 향했다. 분명 지나쳐온 길인데, 시선이 머무는 방향에 따라 이렇게나 다르다. 찻길에서 보발롱 해변 산책길로 진입하는 부근이 그랬다. 해무가 잔뜩 낀 먼바다에서 포말을 일으키며 하얀 파도가 너울 치고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이 산 능선을 빠르게 넘어갔다. 어쩌면 비가 온 것이 신의 한 수였는지 모르겠다. 산허리에 걸린 비구름 안에서, 자연 속에서 달리고 있다는 것이 백배 실감 났으니까. 어린 시절 일부러 비를 맞으며 천방지축 뛰놀던 때가 떠올라 배시시 웃음도 났다.


피니시 라인에서 받은 교환권으로 티셔츠와 메달을 탔다. '제12회 세이셸 에코 마라톤'이 적힌 새 티셔츠로 갈아입고 축축한 운동화에서 발을 끄집어냈다. 빗물에 퉁퉁 불어 쭈글쭈글해진 발가락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어린 시절 언젠가와 겹쳤다. 뜬금없이 소환된 옛 기억에 잠시 몽롱해졌다. 고작 5㎞였지만 뿌듯했고 행복했다. 한바탕 비를 맞고 뜨끈한 물에 샤워한 다음 꿀잠에 빠졌던 그 옛날처럼 세이셸에서도 세상 달콤한 낮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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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셸 100배 즐기기 여행 Tip

1. 115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세이셸은 아프리카 인도양 서부에 위치한다. 한국에서 가는 직항은 없고 두바이, 아부다비 등을 경유해야 갈 수 있다.


2. 마라톤 참가 신청은 세이셸 에코 마라톤 홈페이지에서 가능. 5㎞·10㎞·하프·풀마라톤 중에 선택할 수 있고 참가비는 각각 20유로(약 2만5000원), 25유로(약 3만1000원), 40유로(약 5만원), 60유로(약 7만6000원)다.

※취재 협조=세이셸 관광청


[세이셸 = 홍지연 여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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