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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경향신문

‘꽃보다 청춘’ 그때 그 시절 부모님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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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영상 소셜미디어 틱톡의 ‘10대 얼굴(Teenage)’ 필터로 촬영한 영상이 해외에서 화제가 됐다. 어느새 중년이 된 부모님에게 청소년 시절의 얼굴로 바꿔주는 필터를 사용해보게 하는 영상이다. 처음에는 장난스럽게 웃지만 필터가 되돌린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에 이내 울컥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처음부터 엄마나 아빠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나. 낡은 앨범 속 엄마, 아빠의 청춘을 꺼내 보았다. 그들은 어떤 존재보다 자유롭고 열정적이며 빛났다. 당대 ‘하이프보이’ 그리고 ‘잇걸’이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딸과 아들이 직접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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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아침은 거의 매일 배인숙의 노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로 시작되었다. 커피 향이 가득한 거실에서 전축으로 듣는 배인숙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애절하고, 어딘가 조금 쓸쓸했다. 엄마는 일본 도쿄 신주쿠 골든가에서 ‘파인트리’라는 바를 약 20년간 운영했다. 당시 유일한 한국인 바 경영인이었던 엄마는 2011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1970년대에 청춘을 보냈다. 그 시절 청춘의 상징은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였다. 엄마의 깊은 청바지 사랑은 무려 40여년간 이어졌다. 나팔바지가 디스코바지가 되고 일자바지가 되고 스키니진이 되는 그 모든 유행을 엄마를 통해 지켜봤다. 청바지를 마주할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난다.


20대의 그녀는 얼마나 아름답고 장래가 밝은 사람이었을까, 생각한다. 그 시절 패션리더였던 그녀는 명동에서 모델로 스카우트되기도 했고, 맥주로 머리카락을 탈색하는 기행으로 금발 머리를 자랑하기도 했다. 통굽 신발을 신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서울을 활보했다.


나는 엄마에게 고마우면서도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그 밝은 미래에 나는 과연 보탬이 되었을까, 발목을 잡았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러나 선택은 무를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우리는 엄마와 딸로,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을 택했고, 나는 딸로 엄마는 엄마로 열심히 살았을 게 분명하다.


가족을 위해 무거운 짐도 마다하지 않고 장을 보던 엄마를 고교생인 나는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그걸 누가 다 먹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정작 그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어치우는 사람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이제 엄마가 된 나는 마트에 갈 때마다 양손 가득 식자재를 사 온다. 그런 나 자신을 미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엄마는 나에게 어디에 있든 어떤 순간이든 당당하라고 했다. 당당한 자세로 말하고 주눅 들지 말라고 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선 제대로 살라는 뜻이기도 하다. 주관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정정당당하게 걷는 자만이 타인 앞에서 실로 당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암을 선고받은 것은 2010년이었다. 그리고 2011년 9월 어느 새벽 의사는 덥수룩한 머리로 병실을 찾아와 초점도 맞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임종하셨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사라졌다. 엄마가 그토록 기다리던 가을은 아직 문턱에도 닿지 못한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예순둘의 생일도 코앞이었다. 가을과 생일, 그 둘 중 하나라도 찾아오길 기대했지만 순식간에 죽음이 먼저 당도해 버렸다.


엄마가 다른 세상에서 엄마만의 청바지를 입고,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내가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는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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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느님’도 없고, 피부관리라곤 얇게 썬 오이를 붙이는 것밖에 없던 시절에도 엄마는 참 예뻤다. 논산 아가씨 엄마와 고흥 출신으로 서울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던 아빠는 각자의 친구 결혼식에서 처음 만났다.


아빠는 엄마의 서구적이고 반듯한 미모에 반했고 엄마는 아빠가 그저 동경하던 ‘서울 남자’인 줄 알고 마음을 열었다. 아빠의 ‘출신’을 알고 “속았다” 외쳤지만 4~5시간 원거리 연애도 마다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연애를 해온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결혼에 골인했다.


노란색 저고리에 빨간색 치마를 입은 엄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바로 결혼식 당일 찍은 것이다. 약 40년 전인 당시는 신랑·신부가 예식장에서 식을 올린 후 집으로 돌아와 친·인척과 친구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온종일 잔치를 벌였단다. 마당에서는 풍악을 울리고 누구나 와서 축하하고 잔치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그야말로 동네 축제였다.


엄마는 ‘속은 것’치고는 다복하게 우리 5남매를 낳았고 아빠와 함께 고흥으로 돌아와 한우 고깃집(금탑회관)을 차렸다. 엄마는 우리를 뒷바라지하며 식당일을 병행했다. 어떻게 우리 5남매를 어엿하게 키워냈을까.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물론 우리 5남매는 엄마 집밥 대신 때로는 김밥이나 분식을 사 먹은 기억이 있다. 모두 유년 시절 추억으로 남았다.


그 바쁜 나날에도 엄마는 시골에서 공부에 두각을 보이던 나를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서울에는 대학을 다니는 언니가 있었지만 엄마는 한 달에 두세 번은 고흥과 서울을 오가며 내 학업을 챙겨줬다. 시험 기간이면 빼놓지 않고 내 곁에 머물러 참으로 큰 힘이 됐다.


자식들을 다 키우고 나서 엄마는 50대부터 늘 꿈이었던 일에 도전하기도 했다. 판소리다. 꾸준히 배운 판소리 실력으로 엄마는 김제 전국판소리대회 일반부에서 대상을 탔고, 군청 단원으로 발탁되어 활동 중이다. 얼마 전 열린 공연 <뺑덕전>에서는 주인공 ‘뺑덕어멈’ 역을 맡기도 했다. 최근에는 일본어 공부에 열심이다.


우리 5남매는 엄마를 강철 여인이라고 부른다. 아빠도 멋진 분이지만 가정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엄마였다. 그걸 보며 자란 나 역시 연애 상대나 남편감을 택할 때, 상황이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했다. 강요하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자식을 믿어주고 응원하는 엄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내 주체적인 인생의 8할은 모두 엄마 덕분이다. 그렇게 엄마처럼 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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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의 운명을 바꿔놓은 화재 사고를 겪은 지 7년이 흘렀다.


엄마의 취미이자 특기는 노래 부르기였다. 보수적인 외할아버지 탓에 가수는 꿈도 꾸지 못했던 엄마는 늦게나마 “아마추어 앨범이라도 내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래 엄마, 내가 내줄 테니까 알아보자” 했다. 이 대화를 나눈 뒤 딱 일주일 후 엄마와 나는 화재 사고를 당했다. 엄마는 성대 화상으로 큰 수술을 받은 뒤 목소리를 거의 잃고 말았다.


꽤 심각한 사고였기에 엄마는 5년간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엄마의 달라진 목소리를 듣고 ‘감기에 심하게 걸렸냐’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도 큰 상처로 돌아왔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나 역시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 엄마는 매우 활동적이었다. 나의 학창 시절에는 어머니회, 보이스카우트 회장을 도맡아 했다. 엄마는 30대부터 격식을 차려야 하는 행사에 한복과 쪽 찐 머리를 즐겨했기에 많이 튀기도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예쁜 엄마’로 소문이 나 나를 으쓱하게 했다.


나는 엄마가 빨리 활기찬 일상을 찾기를 누구보다 바랐다. 엄마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줄 수 있는 것은 어떤 일일까? 경기도립무용단 무용수로 활동하다 모델 일을 하고 있었기에 시니어 모델을 하는 분들을 많이 봐왔다. 엄마를 무조건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끈질기게 설득해 시니어 모델 아카데미에 등록시켰다.


내친김에 대한민국 한복 모델 선발대회에 함께 출전하기로 했다. 워낙 한복 애호가였으니 마치 일상복을 입은 듯 엄마는 익숙하게 무대에 올랐다. 결과는 내가 장려상, 엄마가 우수상을 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케미’ 좋은 모녀 모델로 활동하게 됐다.


엄마는 시니어 모델이라는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내가 예고를 다니던 시절 엄마는 각종 무용 콩쿠르에 참가하는 나를 따라다니며 아낌없이 지원했다. 이제는 반대로 내가 엄마의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헤어·메이크업 담당이 되어 따라다닌다.


엄마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찾는 상황을 신기해하면서 자존감도 생긴 듯 보인다. 남들 앞에 목소리 때문에 좀처럼 나서지 않았는데 이제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이라는 소리도 듣고 있다.


엄마가 마음의 상처를 잊어갈수록 나 역시 치유되고 있다. 엄마가 나고, 내가 곧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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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결혼식장에서 당사자보다 하객들의 주목을 받았던 아버지 김용덕 씨의 미모가 빛나던 시절.


부모님은 같은 회사 동료였다. 아버지는 서울 본사, 어머니는 창원지사 직원이었는데 아버지가 창원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어머니도 한 인물 하지만 특히 아버지는 젊은 시절 사내 인기투표 1위를 할 정도로 인기남이었다. 외부 손님이 찾아와 아버지를 찾을 때는 이름보다 ‘그 미국 배우처럼 생기신 분’이라고 칭할 정도로 서구적인 뚜렷한 이목구비의 소유자다. 이상하게도 나는 두 분을 닮지 않아 “엄마하고 아빠 반만 닮았어도…” 하는 어른들의 탄식을 들으며 자랐다.


멋진 사람은 끝까지 멋지다더니, 꽃청년 아버지는 꽃중년이 되었다. 심지어 내 결혼식에서조차 아내의 친구들이 “시아버지가 왜 이리 잘생겼느냐”며 신랑인 나 말고 아버지 얘기만 하는 통에 결혼 당사자 입장에서 다소 속상하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가 최우선이었다. 결혼 후 아버지의 본사 발령으로 서울로 이사했는데 어머니가 삭막한 도시 생활이 낯설어 고향을 그리워하자 아버지는 두말하지 않고 다시 창원행을 택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셨다. 학창 시절 내가 만만치 않게 말썽을 부려 ‘과일 바구니’를 꽤 사다 날라야 했으나 매 한 번 들지 않았다.


내가 말썽을 피우고 집에 들어온 날은 “우리 동한이가 그럴 애가 아닌데…” 한숨을 쉬며 집 안을 서성이는 것이 전부였다(사실 그게 더 부담스러웠다).


어머니 역시 크게 우리 형제를 혼내거나 다그친 적이 없었다. 그러다 한 번은 내가 말썽을 피웠다는 누군가의 ‘제보 전화’를 받은 어머니가 침대 옆에서 몰래 흐느끼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놀이터로 놀러 나가려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 이후로는 ‘순둥이 모드’로 학교에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에도 어머니의 소리 없는 오열은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부모님은 늘 나를 믿어주고 자유분방하게 키워주셨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 해보라는 말씀 덕분에 춤도 추고 기타도 치고 또 간혹 사고도 쳤다. 부모님 덕분에 잔재주가 많은 어른이 되어 자동차 관련 1인 크리에이터 채널(@longhi_godsper)도 운영하고 있고 목공 일도 배워 본업으로 삼고 있다.


아! 그러고 보니 딱 한 번 아버지가 나에게 크게 호통을 친 적이 있는데 바로 내가 어머니에게 대들었을 때다. 스스로 아버지가 된 후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정말 멋진 남편이다.


아쉽게도 ‘비주얼’은 닮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성품만은 닮고 싶다.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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