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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by 점프볼

“농구빼면 저는 그냥 집순이에요”

[김종수의 농구人터뷰(76)] '미녀 가드' 전주원

‘역대 최고 가드? 역대 최고 인기 스타? 역대 최고 미녀 스타? 역대 최고 선수?’ 하나같이 답하기 쉽지않은 질문에 모두 해당되는 선수를 꼽으라면 누가 가장 먼저 생각날까? 이쪽이 맞으면 저쪽이 안맞고 매우 난감한 질문같지만 그래도 답에 근접한 인물은 있다. 상당수 팬들은 '미녀 가드'라는 별명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우리은행 전주원(51‧176cm) 코치를 떠올릴 것이다.


전주원은 여러 가지 부분에서 한국여자농구사에서 다시 나오기힘든 유니크한 스타다. 빼어난 재능과 실력을 가지고 결과로 보여줬고, 누구보다도 롱런했으며, 인기와 미모까지…, 완벽에 가까운 커리어를 보냈다. ‘농구를 위해 태어난 인물이다’는 표현이 과장으로 느껴지지않을 정도다.


◆ 전주원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330경기 출전 평균 10.34득점, 3.95리바운드, 6.56어시스트, 1.39스틸, 0.58블록슛 ​


⁕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1999년 7월 18일 중국요녕전 = 31득점 / 어시스트 ☞ 2003년 7월 20일 금호생명전 = 18개 / 리바운드 ☞ 2000년 1월 12일 신세계전 = 18개 / 스틸 ☞ 2003년 7월 12일 삼성생명전 = 8개 / 블록슛 ☞ 2006년 7월 17일 KB스타즈전 = 4개


어시스트왕 10회, 정규 리그 MVP 1회, 챔피언결정전 MVP 2회, 베스트5 10회 등 수상 기록도 화려하다. 놀라운 것은 여자프로농구는 1998년 출범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1990년 실업팀 현대산업개발에 입단해서 선수생활을 시작했으니 프로가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20대 후반에 접어들고 있을 때였다.


1991년 신인상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으며 실업시절 단 한차례만 빼고 모두 베스트5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처음부터 쭉 잘했다. 실업팀부터 WKBL까지 한 팀에서만 21시즌을 현역으로 뛰었으며 5년 연속 통합 우승을 이뤄내는 등 총 7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더욱 놀라운것은 대체불가 국내 최고 가드였던 탓에 국제대회에도 꾸준하게 출전했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철의 여인'이 따로 없다.


국제대회 성적도 나쁘지않았다. 아시안게임에서 금, 은 ,동메달을 모두 수상했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4강에 올라 1984년 LA올림픽 은메달 이후 최고의 성적을 달성했다. 2000년 9월 24일 시드니 올림픽 쿠바전에서 기록한 트리플더블(10득점, 10리바운드, 11어시스트)은 올림픽 사상 남녀 최초 트리플더블로 역사에 남아있다.


2003년 출산과 육아 문제로 한 차례 은퇴한 후 2005년 복귀했으며 2010~11시즌을 끝으로 다시 은퇴했다. 여성선수들의 선수 생명이 짧던 실업시절에 데뷔해 오랜시간 동안 정상급 기량을 유지하며 현역생활을 이어간 것을 비롯 ‘출산=은퇴’라는 공식이 당연시되던 시점에서 다른 선례를 남겼다는 점 

사이즈+재능+성실성 등 선수로서 갖춰야할 것을 고르게 겸비했던 그녀는 외모까지 출중해 남녀 팬들에게 고르게 사랑을 받았다. 별명에 공식적으로 ‘미녀’라는 단어가 들어간 당시 흔치않은 선수로, 그러한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않았다. 흔히 표현되는 ‘운동선수치고 예쁘다’가 아닌 운동이라는 단어를 빼고도 미녀로 불렸다.


역대급으로 잘하는데다 외모까지 압도적인 선수…, 거기에 지도자로서도 오랜시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동시대 경쟁자들 입장에서는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녀의 취미는 무엇일까? 농구빼고는 딱히 없다. “저는 농구공을 잡고있지 않을 때는 그냥 집에 있는 것을 즐겨요. 전형적인 집순이거든요. 술을 먹는 것도 아니고 딱히 꽂혀있는 다른 취미나 관심사도 없고, 그냥 집이 좋아요”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입가에 점요? 생각보다 모르시는 분들도 많으시던걸요”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시즌이 끝나서 정신없이 바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스케줄이 쭉 있어서 이것저것 조금씩 하고있어요. 시즌 종료후 2주 정도는 인사드릴데 인사드리고, 시즌 중에 못했던 것들도 했고요. 제가 집순이라서 남는 시간은 주로 집에서 보내는 편이에요. 어떤 분들은 제가 잘 놀것 같이 보인다고도 하던데 농구 외에는 딱히 잘하는 것도, 관심이 많이 가는 것도 없어요. 집에서 쉬어야 쉬는 것 같고 그냥 집이 편해요. 가끔 친구나 좀 만나고 아님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는데 그 녀석하고 산책도 하면서 노는 시간이 참 즐겁더라고요. 조만간 일본에 갈일도 생겼어요. 29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WKBL 라이징스타 팀과 일본 WJBL 소속 선수들로 구성된 W리그 올스타 유나이티드가 친선경기를 가져요. 한일 양국 선수들이 올스타전에서 맞붙는 것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Q.친선경기 사령탑을 맡게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러게요. 코칭스태프로는 6개구단 수석코치가 함께 하는데 과분하게도 제가 감독을 맡게되었습니다. 조수아, 이해란(삼성생명), 이혜미, 이다연(신한은행), 나윤정, 박지현(우리은행), 박소희, 박진영(하나원큐), 이소희, 박성진(BNK 썸), 허예은, 양지수(KB스타즈)로 선수단이 구성되었습니다. WNBA 출신 도카시키 라무, 2020 도쿄올림픽 은메달의 주역 미야자와 유키, 아카오 히마와리 등 일본측에서도 좋은 선수들이 많이 참여하는 것 같더라고요. 선수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고 한일 양국에도 의미깊은 무대가 되지않을까 싶어요. 좋은 경기 펼칠 수 있도록 해봐야죠.


Q.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남편하고 딸이 한명 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올해 대학들어가요. 최근 농구인 2세들이 화제라 저에게도 그런 것 묻는 분들이 가끔 계시는데 전혀요. 딸은 운동하고는 관련없는 길을 가고있어요. 운동신경은 제법 있는 것 같지만 운동이라는 것은 본인이 간절하게 원해서 시작해도 잘될까 말까잖아요. 딸은 농구에는 별반 관심이 없더라고요. 진짜로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서 본인의 삶을 살기를 엄마로서 바라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운동인 집안은 아니었고요.


Q.나이에 비해 상당한 동안이고 살도 안쪘는데 지금도 관리를 하고 있나요?

동안요? 하하핫…, 민망해요. 저 동안아니에요. 그냥 제 나이로 보여요. 살이 안찌고 있는 것은 직업적인 특성도 있지않나싶어요. 직접 코트에서 뛰지는 않지만 경기내내 서있어야하고 선수단하고 동행해야 하는지라 살이 찔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시즌내내 서서 경기를 지켜보고 훈련이나 기타 일과 등을 선수들과 함께하다보면 에너지가 제법 소모되거든요. 선수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은근히 체력소모가 상당합니다. 거기에 제가 술을 전혀 못마시는 것도 작은 이유중의 하나로 포함될 듯 싶고요.


Q.많이 들어보셨을 것 같은 질문이기는 한데…, 언제부터인가 입가에 점이 없어졌어요?

점을 뺀게 2007년인가…, 꽤 오래됐어요. 요즘 친구들은 제가 점이 있었나도 몰라요. 저를 예전부터 보셨던 올드팬분들 정도만 그것을 기억하고 계시죠. 주변에서는 점을 빼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분들도 많았어요. 복점 등으로 여기고 계셨나봐요. 하지만 저는 아주 예전부터 빼고싶었어요. 거울을 보면 점만 보이는지라 개인적으로 살짝 스트레스도 있었거든요. 어찌되었든 제 트레이드 마크같은 역할도 했던지라 점을 빼면 사람들이 저를 못 알아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처음에는 살짝 했어요. 하지만 현실은, 제가 점을 뺀 것을 사람들이 모르더라고요.(웃음)

“우리은행으로의 이적, 성장을 위해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Q.점이 있었나도 모르는 친구들이 있다고요? 천하의 전주원인데요?

왜 그러세요.(웃음) 올드 팬분들이야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도 꽤 되실 수 있겠지만 요즘 친구들은 저 거의 몰라요. 실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후배들도 많은데 은퇴한지도 꽤 되어가는 저를 못알아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않을까요. 기자님이야 스포츠를 좋아하시니까 좋게 봐주시는 것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저를 모르는 분들은 더더더더 늘어날거에요. 서운하고 그런 것은 없어요. 저는 제 시대를 충실히 살아왔고, 현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후배들은 거기에 맞게 스타가 되고 유명세도 누리고 그래야죠. 그리고 천하의 전주원이라니요? 저 돌맞아요. 동시대에 얼마나 훌륭한 선후배가 많았는데요. 저는 그중 하나 정도로만 생각해주세요.


Q.예전에 농구를 잘했던 분들은 지도자를 하게되면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어요. 코치님같은 경우는 어떨까요?

선수와 지도자는 다른 영역이니까요. 마음가짐부터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하는 선수가 그런 생각은 할 수도 있어요. 겉으로 막 티를 내면 재수없겠지만요.(웃음) 하지만 가르치고 끌어줘야하는 지도자는 그러면 안되죠. 선수마다 능력치와 성향이 다 달라서 하나를 가르쳐주면 둘 셋을 캐치하는 선수가 있고 그 하나도 버거워하는 선수도 분명 있어요. 하지만 지도자라면 그러한 선수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원팀으로 뭉치게 할까를 고민해야죠. 저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답답한 마음도 들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을 내려놓고 비슷한 눈높이에서 함께 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현재 배우고있는 입장이에요. 감독도 아니고 코치에요. 프로까지 올 정도면 기본적인 재능은 다들 가지고있어요. 빨리 흡수하느냐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지도자로서 아직 한참 부족하고 여전히 배우고 있는 사람으로서 함께 성장해서 꾸준히 좋은 결과를 내고 싶습니다.


Q.농구공을 잡은 이래 전혀 쉬질 않은 것 같아요.

음…, 그렇네요. 선수생활도 나름 오래했고 바로 지도자를 시작했으니까요. 저같은 경우 쉬고싶다는 생각은 아직 해보지않았어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일 욕심은 많은 편이라 제가 쭉 해왔고 사랑하는 농구와 함께 하는 것이 너무 행복해요. 누군가 저를 필요로하고 거기에서 열심히하는 것 만큼 좋은게 세상에 어디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운이 따랐다고 생각하고요. 운에 그치지않고 더 많이 배우고 열심히 하고싶습니다.

Q.쉬지않고 달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족분들의 도움도 컸을 듯 싶어요.

너무너무 당연하죠. 출산 후에도 현역으로 다시 복귀 할 수 있었던 것을 비롯 현재의 지도자 생활까지…, 모든 것에서 정말 가족의 도움 아니 희생이라고 표현할께요. 가족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거에요. 남편도 정말 많이 이해해주고 도와주고, 저희 딸도 시어머님께서 정말 잘 키워주셨어요.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가족이 있었기에 농구인으로 계속 살 수 있는 것이죠.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도 모자라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잊지못할 부분입니다. 저 역시도 농구 일이 없는 날은 최대한 집에서 가족과 함께하려고 합니다.


Q.본인이 생각하는 지도 스타일은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흔히들 지도자들 성향을 맹장, 덕장, 지장 그런식으로 나누더라고요. 저는 아직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려면 아직 먼 사람이고요. 상황에 맞게 자연스럽게 가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설명을 해가면서 적어도 그 상황에 맞는 지도는 하고싶어요. 그게 더 어려운 것이려나요?(웃음) 어쨌거나 프로의 세계는 승부의 연속이니까 잘 풀리면 웃을 일이 많고 잘 안되면 그럴 일이 줄고 그러겠죠. 선수들과 좋은 결과를 내면서 많이 웃고 파이팅하면서 좋은 분위기를 쭉 끌고가고 싶은게 바램이랍니다.


Q.과거하고는 지도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졌어요.

달라졌죠. 제가 농구배울 때만해도 가르치는게 다라고 여기던 시대잖아요. 선생님들이 시키면 시킨데로 그대로 따라하는게 전부였죠. 그것을 잘 따라하는게 좋은 선수였고요. 하지만 요즘 선수들은 개성도 강하고 자기 주장도 내세울줄 알아서 지도자도 거기에 맞게 함께 할 필요가 있죠. 꼭 농구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지시보다는 이해가 필요한 시대잖아요.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자율과 책임이 적절히 함께 할 때 더 발전할 수 있는 부분도 많으니까요. 제가 선수들을 눈치봐야 될 때도 있고 선수들이 제 눈치를 봐야 될 때도 있어요. 예전 분들은 그것을 타협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소통이라고 표현하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Q.선수시절부터 신한은행(전신 현대)의 상징적인 존재였잖아요. 하지만 지도자 생활 초창기에 위성우 감독을 따라서 우리은행으로 둥지를 옮겼어요.

정말 고민이 많았던 시기에요. 신한은행에서도 제가 상징적인 존재였겠지만 저 또한 이전까지 평생 농구를 해온 신한은행은 특별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집순이 스타일이고 막 옮겨다니는 것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시키는 것은 잘하지만 어지간해서는 잘 나서지않죠. 안정감있게 한자리에 머무는 것이 편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어요. 일단 저에게 코치 기회를 준 신한은행에게는 엄청 감사드리죠. 지도자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요. 다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신한은행에서 잘되면 저는 프랜차이즈 스타 대우를 받는 것이지만, 옮겨서도 좋은 결과를 낸다면 다른 어떤 팀에 가서도 잘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검증받게 되는 것이라고. 더불어 지도자로서는 한팀의 색깔로 고정되기보다는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싶었어요. 일종의 도전이었던 것이고, 처음 나서본 경험이었습니다. 지금도 배워나가는 과정 중에 있고요.

Q.신한은행 선수들이 눈에 밟히지는 않았나요?

밟혔죠. 선수시절 내내 희노애락을 함께 했는데요. 동료 수준을 넘어 전우같은 느낌마저 들 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도전을 선택한 배경에는 그런 부분도 이유로 작용했어요. 당시 저는 막 은퇴한 상태인지라 선수들에게는 코치보다 언니가 더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고참으로 팀을 이끌어가는 것과 코치로 있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고참이야 솔선수범해서 열심히하는 모습보이고 때때로 선수들의 입장을 대변하면 되지만, 코치는 선수보다는 코칭스태프의 입장에 서야 될 때도 많고 쓴소리도 계속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와 선수단은 여전히 언니 동생의 느낌이 더 강했어요. 물론 이후 저와 현역 생활을 함께 하지않은 새로운 피들이 들어와서 주축으로 성장하게되면 그 친구들에게는 제가 언니가 아니겠죠. 그러려면 오랜시간을 기다려야했고 코치로서의 배움도 그만큼 늦어진다고 판단했습니다.


Q.팀을 옮기자마자 우리은행이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어요. 남다른 쾌거였지만 모친상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고 그로인해 검은 정장을 입고 시리즈를 함께 했습니다.

엄마가 1차전 끝나고 돌아가셨어요. 1차전을 보시고 저에게 ‘올해는 우승할 수 있겠구나’라고까지 말씀을 하셨었는데 그날 새벽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전부터 꾸준히 지병을 앓아오신것도 아니고 급성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신 것인지라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었죠. 시리즈를 어떻게 치른지도 모르겠어요. 경기장에서는 최대한 다른 생각을 안하려고 노력했고 시합이 종료된 이후에는 머릿속이 멍했던 기억이 납니다. 꽤 오랜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엄마가 돌아가셨다는게 실감이 나지않아요. 고등학교 때부터 엄마와 떨어져있는 시간이 많았거든요. 그래서인지 잠시 떨어져 있을 뿐 언제든지 집으로 가면 반갑게 맞아주시고 그럴 것 같아요. 지금도 가끔 울컥할 때가 종종 있어요. 어떤 포인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문득문득 그래요.


Q.여성 농구인 최초로 국가대표 지휘봉도 잡았지만 감독직 연장을 고사하면서 짧은 임기로 마무리되었어요.

사실 여성 농구인 최초 이런 수식어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그런 것 없이도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자리가 주는 책임감은 매우 무겁죠. 난생 처음해보는 감독직을 국가대표로 나갔으니 개인적으로는 정말 부담스러웠습니다. 제가 잘하는 것은 다소 약하지만 열심히 하는 것은 잘할 수 있어요. 때문에 정말 제가 할 수 있는 능력선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불태웠던 올림픽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제 인생에 있어서 충분히 의미깊은 시간들이었던 것 같아요. 배운 것도 많고 지도자로서나 한명의 인간으로서나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감독직 연장을 제가 고사한 것은 아니고요. 당초부터 해당 대회만 나가기로하고 감독을 하게된거에요. 아시다시피 저 다음부터는 남녀모두 전임제로 바뀌었잖아요. 예전같이 프로팀 지도자와 대표팀 감독을 겸할 수가 없게 됐습니다.

“허재, 강동희 아저씨의 플레이를 장난삼아 따라하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Q.농구를 시작하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같은 경우 사실 농구에 대해 잘 알지 못했어요. 운동자체에 별반 관심도 없었고요. 반면 아빠께서 스포츠를 상당히 좋아하셨습니다. 당시 아빠 친구 딸이 선일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농구를 하고있었어요. 친구분과 ‘내 딸도 농구를 하고있는데 네 딸도 한번 시켜봐라’는 식의 대화가 오간 것 같아요. 아빠의 권유로 테스트를 받아서 5학년 3월부터 농구부에 들어가서 시작을 하게됐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몰라서 어리둥절한 마음도 컸지만 당시 선일초가 꽤 강팀이었던지라 성적이 좋았어요. 이기는 경기가 많았고 멋진 언니들을 따라다니면서 응원하다보니 저도 재미가 붙더라고요.


Q.농구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테스트를 봤다는데 신체조건이나 운동신경 등에서 가능성을 봤나봐요?

전혀요. 당시 저는 테스트를 받은 아이들중 작은 편에 속했고 운동신경도 썩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어요. 객관적으로봐도 별반 눈에 띄는 장점은 없었다고 기억됩니다. 사람의 운명은 아주 작은 것에서 갈린다고 하죠. 제가 합격한 배경에는 에피소드가 하나있어요. 당시 테스트 현장에 고등학교 선생님이 내려오셨어요. 나중에 저의 은사님이 되시기도 하셨죠. 그분께서 테스트받는 아이들에게 귤을 하나씩 나눠주셨어요. 옆의 아이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는데 저는 감사합니다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까서 먹었죠. 그 모습이 좋게보였나봐요. ‘저 아이는 성격이 좋은 것 같으니 뽑자’고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성격? 사실 저는 그냥 당시에 배고픔을 잘 못참는 아이였기에 바로 귤을 먹은 것 뿐이거든요.


Q.처음부터 가드를 봤을까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작았으니까요. 그러다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말 그대로 폭풍 성장을 거듭했죠. 일년에 10cm이상씩 자랐어요. 다행히 그런 와중에도 포지션을 바꾸지않았어요. 쭉 가드를 하다보니 주변에서 ‘장신 가드’로 주목하게됐고 저 또한 자신감을 가지고 플레이하게 됐습니다. 재능보다는 피지컬의 도움을 꽤 받았다고 생각해요. 운이 따른거죠. 당시 선배 언니들중에 빼어난 가드들도 정말 많았어요. 패스를 잘하는 언니, 득점력이 좋은 언니 등등, 저같은 경우는 그 시절 기준으로 신장이 좋은 편인지라 수비수로서의 가치도 있고해서 눈길을 끌지않았나 싶어요. 처음 국가대표에 뽑혔을 때가 기억나요. 당시 (박)현숙언니, (천)은숙언니, (손)경원언니 등이 있었습니다. 하나같이 쟁쟁한 언니들이죠.

Q.학창시절 롤모델이나 우상같은 존재가 있었을까요?

다른 포지션까지 갈 것도 없이 가드 쪽에서도 워낙 뛰어난 언니들이 많았으니까요. 그냥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아남기 바빴던 시절같아요. 우상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눈에 띄는 분들은 있었어요. 남자농구의 허재, 강동희 아저씨들요. 같은 가드 포지션이기도 했고 당시 워낙 유명했잖아요. 제가 막 농구를 시작했을 때 허재 아저씨가 용산고 3학년이었어요. 원체 전국구로 명성을 떨쳤던지라 친구들은 다들 알았더라고요. 저같은 경우 그분들이 대학교를 진학하고나서야 알게됐어요. 파워풀하고 기술도 좋았던지라 장난삼아 플레이를 따라해보고 했던 기억이 나요.(웃음)


Q.1번같은 경우 크게 퓨어 포인트가드, 듀얼가드로 나누잖아요. 어느 쪽에 더 가까웠을까요?

저는 정통파 그러니까 퓨어 포인트가드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코트에 들어서면 기본적으로 어떻게하면 동료들을 살려줄 수 있을까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쓰고 득점보다는 좋은 패스를 넣어주거나 어시스트가 만들어질 때 기분이 업됩니다. 팀 상황이나 사정에 따라 공격에 치중하거나 대표팀 등에서는 2번을 맡을 때도 있었어요. 아무래도 신장이 있다보니 멀티롤을 하게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죠. 하지만 기본적인 성향이나 원하는 플레이 등에서는 1번으로서 게임을 조율할 때 가장 움직임이 좋고 저도 신바람이 났던 것 같아요.


Q.남자농구도 그렇지만 여자농구도 듀얼가드가 대세가 된지 꽤 된 듯 싶어요.

그렇죠.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예전에는 각 포지션별로 역할이 확실한 분업농구를 많이 했잖아요.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본인 포지션에 충실했죠. 그래서 전체적인 조율을 잘하는 정통 포인트가드가 많았던거고요. 지금은 자신의 포지션만 고집하다가는 도태되는 시대잖아요. 센터에게도 함께 뛸 수 있는 기동력이나 3점슛 능력이 요구되고 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다방면에 능한 선수가 많아지고 그로인해 리딩형 1번의 역할도 축소되면서 듀얼가드가 많아지고 있지않나 싶어요. 시대의 흐름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언젠가 트랜드가 달라질 수도 있겠죠.

“인간 전주원과 농구인 전주원은 조금 다릅니다”

Q.오랜 시간 동안 현역으로 활약했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롱런 비결은 무엇일까요?

비결이랄 것은 없고요. 제가 무릎 때문에 고생을 좀 했던지라 일찍부터 웨이트 트레이닝 및 재활 등에 상당히 신경을 썼어요. 더불어 노장이 된 후에도 ‘이 나이에도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젊은 친구들보다 많은 훈련량은 가져가지 못해도 비슷하게는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어지간하면 열외같은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소화하려고 노력했고요. 일단 몸이 튼튼해야 기술이고 노련미고 나올 수 있는 것이잖아요. 타고난 강골도 있겠지만 저는 그 정도는 아니라서, 최대한 건강한 상태로 몸을 유지하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Q.선수들 얘기들어보면 나이를 먹어가면서 몸도 아프고 플레이도 뜻대로 되지않으면 ‘이쯤이 내가 그만둘 때인가?’라는 생각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아휴…, 저도 수십번 했죠. 다른 선수들도 비슷할거에요. 다만 또 하다보면 플레이가 잘되고 그로인해 다시 재미있어지고 그런게 반복되면서 은퇴시기가 늦춰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출산 후 성공적으로 복귀했잖아요. 결혼 당시부터 그려놓은 청사진이었나요?

아니요. 전혀요.(웃음) 이미 1차로 은퇴했던 시기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거든요. 당시 33살이었는데 보통 여자선수가 그정도 나이까지 뛰었으면 선수 생활 오래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였거든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전 선배님들 같은 경우는 20대에 은퇴한 케이스가 대다수였어요. 때문에 실업무대에 데뷔했을 때만해도 그 정도까지 현역으로 뛸 것이라는 것도 기대하지 않았었고요. 출산후 구단에서 적극적으로 복귀를 권했지만 처음에는 그러고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이전까지 출산후 선수 생활을 이어간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었거니와 예전같지않은 몸상태로 덜컥 덤벼들었다가 과거 명성까지 잃어버리면 어쩌지하는 우려도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Q.선수로 뛸 수 있는 몸을 다시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듯 싶어요.

아무래도요.(웃음) 이미 운동선수로서 노장에 들어선 상태에서, 결혼 후 출산으로 인한 공백기도 생기고 몸상태도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다행인 것은 다시 뛸 수 있는 몸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예상보다 빨랐다는 부분입니다. 그래도 운동을 하기에 나쁜 몸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복귀하기로 결정을 내린 순간 부담 등은 내려놓으려고 노력했어요. 운동은 육체 경쟁못지않게 멘탈 싸움도 중요한데 재시작 단계부터 지고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차라리 남은 시간은 덤이라고 마음먹기로 했죠.

Q.현역 시절 내내 인기가 좋았어요. 남성 팬들도 많았고요. 대쉬하고 그러는 분들은 안계셨나요?

농구인기가 많이 좋았을 시절부터 선수생활을 시작했던지라 팬분들에게 과분한 사랑도 많이 받았죠. 저만 그런 것은 아니였겠으나 편지, 선물 등도 많이 받았고 매일같이 꽃들고 기다리시는 분도 계셨어요. 스포츠는 팬들이 계셔야 빛이 날 수 있는지라 한분 한분의 애정어린 관심과 응원이 그저 감사했습니다. 다만 남녀관계로의 발전? 그런 것은 전혀 없었어요. 그분들은 저에 대해 전혀 모르잖아요. 인간 전주원이 아닌 농구선수 전주원만보고 좋아해주시는 것이니까요. 농구선수로서의 저와 일상에서의 저는 많이 달라요. 예를 들자면 저는 농구만큼은 정말 열정적이고 부지런히 했지만 그 외에는 집에 있는 것 좋아하고 여행도 딱히 즐기지 않았어요. 약간의 귀차니즘(웃음) 그런게 강하단말이에요. 생각보다 심심한 사람이에요. 남편같은 경우 정말 우연히 만났어요. 제가 농구선수다는 것도 잘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레 인간으로서의 저를 보여줄 수 있었고 결혼까지 연결된 것 같아요.


Q.농구선수 외에 외과의사의 꿈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부상이나 그런 것을 겪으면서 생긴 것일까요?

아뇨. 농구하고 전혀 관계없이 그냥 생겼던 꿈이에요.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꾸었던 꿈이거든요. 지금은 모르겠는데 예전 초등학교때보면 개구리 해부하고 그런 실습시간이 있었어요. 조별로 나눠서 하는데 대부분 친구들은 제대로 손도 대지못하기 일쑤였는데 저는 달랐어요. 과감하게 척척했고 옆에 조로 건너가서 다른 친구들도 도와주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앉아서 꼬물꼬물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러다보니 어린마음에 의사가 되어서 아픈사람들 수술하고 그런 것도 저하고 잘 맞을 것 같더라고요. 아주 어린 시절의 꿈이었죠.(웃음)


Q.마지막으로 농구인 전주원을 응원하는 팬 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농구를 시작하던 그 순간부터 저는 마음 속에 큰 농구공을 하나 품고 살아왔습니다. 개인적으로 ‘꿈’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은데, 때로 확 커졌다가 상황에 따라 줄어들기도하고 바람이 빠져 쭈글쭈글해졌다가도 금세 탱탱해져서 하늘높이 올라가기를 반복했어요. 팬분들은 그러한 과정을 함께 보면서 힘을 나눠주신 분들이세요. 감사하다는 말로도 부족하죠. 팬분들이 있어서 지금도 농구공과 함께 꿈을 꿀 수 있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나눠줄 수 있지않나 싶어요. 인간 전주원은 평범한 집순이지만 농구인으로서는 열정을 잃지않는 전주원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W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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