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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밥은 먹었냐”며 챙겨주던 선배… 마음까지 매콤달콤 채워주네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제육볶음

서울 소공동 '사직골' 제육볶음(앞)과 청국장./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건조기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늘어난 체육복 바지에 오리털 점퍼를 입은 나는 귀에 이어폰을 끼고 서 있었다. 겨울방학이었다. 대학 기숙사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은 몇몇 학생들만 자리를 지켰다. 온기를 찾아 바로 옆 학생식당에 갔다. 내 이름을 부르는 이가 있었다. 과 선배였다.


“밥은 먹었냐?” 우물쭈물 답했다. “아뇨.” 선배가 어깨를 치며 말했다. “과외비 탔으니까 아무거나 골라.” 복권에라도 당첨된 것처럼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비싼 메뉴를 골랐다. 제육볶음이었다. 가장 싸게 먹을 수 있는 고기 음식이기도 했다. 선배는 늘 먹던 대로 라면과 공깃밥을 시켰다. 선배가 과외비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밥을 먹느라 기울인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제육볶음은 여전히 제일 싼 고기 요리 중 하나다. 양념을 잔뜩 치니 싼 고기를 써도 되는 까닭이다. 그만큼 흔하고 만만한 음식이다. 하지만 서울 공덕동 ‘굴다리식당’의 제육볶음은 독특한 맛이 난다. 돼지고기를 깍두기처럼 툭툭 썰어 매콤한 양념에 볶은 제육볶음은 탄력 있게 씹히는 비계와 묵직한 살집이 씹혔다. 매운맛 뒤에 숨은 단맛이 과하지 않아 아무리 떨어진 입맛이라도 선수처럼 밀고 당기며 수면 위로 이끌어냈다. 탁자마다 플라스틱 반찬통에 넉넉히 담아놓은 김, 서비스로도 나오는 달걀말이, 동그란 어묵볶음 같은 반찬까지 곁들이니 식욕이 폭발 직전에 다다랐다.


강변북로를 타고 성수동에 가면 ‘성수아구찜’이란 집이 있다. 뚝섬역 근처 여전히 기계를 돌리고 있는 회색빛 공업사들 사이에 위치한 이 식당은 상호처럼 아귀찜을 주력으로 한다. 그러나 단골들은 아귀찜이 이 집의 유일한 특기가 아니란 것을 안다. 아귀찜만 아니라 꽃게찜, 홍어찜, 홍어삼합, 닭볶음탕에 삼겹살, 심지어 복지리까지 팔지 않는 음식이 없다.


전분을 풀어 만든 걸쭉하고 매콤한 양념이 어우러진 아귀찜은 저녁 동료들과 모여 도란도란 술잔을 기울이기 딱 좋은 맛과 양이었다. 바쁘게 점심 한 끼 때울 때 해장을 겸해 곁들이기는 역시 동태탕이고, 든든히 배를 채우려면 제육볶음을 상 가운데 놓아야 한다.


얇게 썬 고기에 제육볶음 특유의 달콤하고 빨간 양념이 윤기를 내며 묻어 있었다. 뜨거운 불에서 빠르게 볶아 하얀 김이 온천에 온 것처럼 살살 올라왔다.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직감이 왔다. 남이 먹을세라 빠르게 제육볶음을 밥 위에 올려 머슴이 된 것처럼 입에 욱여넣었다. 바삭한 김, 젓갈 같은 것들도 밥에 올렸다. 기어이 밥 한 공기를 더 시키고 말았다.


서울 한복판 소공동으로 오면 사직동에서 자리를 옮긴 ‘사직골’이 있다. 사직동에 있을 때부터 청국장과 두부찌개로 이름을 날렸다. 자리에 앉자마자 빠르게 찬부터 나왔다. 도라지, 파김치, 어묵볶음, 고등어조림처럼 언제나 곁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보기 힘들어진 찬들이 가득했다.


콩이 알알이 씹히는 청국장은 특유의 강한 냄새가 없었다. 쿰쿰한 향이 과하지 않았고 대신 부드럽고 상쾌한 여운을 남겼다. 투박하게 잘라 넣은 단단한 두부는 든든하게 속을 채웠다. 시골에서 막 퍼 담은 듯한 멋과 맛이었다.


제육볶음은 값만큼 당당한 위용이었다. 비계와 살코기가 1:1로 섞인 돼지고기를 붉은 양념에 빠르게 볶으며 파채를 곁들였다. 여느 집보다 붉은색의 채도가 선명했다. 단맛은 절제되었고 어른들 입맛에 가까웠다. 고춧가루를 주로 쓴 덕에 텁텁하지 않았고 뒷맛이 깔끔하게 떨어졌다.


하얀 머리의 주인장은 사자처럼 주방을 호령하고 손주를 돌보는 할머니처럼 손님을 챙겼다. 반찬이 모자라진 않는지, 맛이 떨어지진 않는지 손님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밥은 먹었냐”고 챙겨주던 어느 겨울 저녁의 기억이 돌아왔다. 배를 채우고 마음을 데우는 것은 그렇게 나를 부르는 소리 같은 것이었다.


# 굴다리식당: 김치찌개 8000원, 제육볶음 1만1000원. (02)712-0066


# 성수아구찜: 아귀찜 4만원(소), 동태탕 8000원, 제육볶음 8000원. (02)465-4346


# 사직골: 청국장 7000원, 제육볶음 1만7000원. (02)736-0598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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