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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9·11 테러 직후 문 연 식당… 우디 앨런 단골집 됐죠”

[아무튼, 주말] 뉴욕 코리아타운 터줏대감

‘더큰집’ 박혜화 사장


미국 뉴요커들에게 맨해튼 32번가 코리아타운에 있는 ‘더큰집’은 한식을 처음 경험하는 식당으로 유명하다. 뉴욕타임스는 ‘뉴욕 코리아타운 한식당의 기준(standard)이 되는 식당’으로 꼽았고, 미쉐린가이드·재깃 등 식당 가이드북들도 빠짐없이 이 식당을 소개했다. 뉴욕과 인근 지역에서 학교를 다닌 유학생이나 대기업·상사 주재원, 외교관이라면 ‘더큰집’에서 한국 음식을 먹으며 향수를 달랜 기억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이 코리아타운 터줏대감을 창업한 박혜화(67) 사장을 최근 서울 강남 신사동에서 만났다. 박 사장은 “새로운 메뉴 아이디어를 얻으러 1년에 한두 번 꼭 한국에 온다”고 했다.


―웬만한 대통령, 재벌 그룹 회장, 연예인, 운동선수는 다 보셨다고요.


“뉴욕 오시면 다 우리 집에 오시니까요. 대기업 회장님들은 안 모셔본 분이 없는 것 같아요. 영화감독 우디 앨런도 우리집 단골이에요. 뉴욕 출장 오신다고 하면 우리 요리사들이 회장님 식성에 맞게 배추김치, 열무김치, 깍두기를 준비할 정도였죠.”


―미국에서 활약한 운동선수들도 자주 왔다고요.


“박찬호, 서재응 다 우리 단골이죠. 경기 이기면 꼭 한식 먹으러 와요. 힘 달릴 땐 고기 먹으러 오고. 스태미너에 좋다면서 소 간을 구해 달라는 선수도 있었어요.”


―유명 인사들이 오면 오히려 장사에 방해된다고요.


“누가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몰려서 난리가 나요. 손님들이 들어오질 못해요.”


박 사장 가족은 1988년 서울올림픽 직후 미국으로 이민했다. 박 사장은 “형편이 어려워서 이민 간 건 아니고, 뉴욕 이모네 집에 놀러 갔다가 주저앉게 됐다”고 했다.


―한식당은 어떻게 열게 됐나요.


“코리아타운에 있는 식당에 가보니 장사가 잘되더라고요. 잘하면 괜찮겠다 싶었죠. 미국에선 식당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배우려고 지금은 없어진 ‘우촌’이란 식당에 웨이트리스로 들어가 매니저까지 했어요.”


―영어 때문에 고생은 안 하셨나요?


“외국 손님들을 접대해야 하는데 영어를 모르니 애먹었죠. 일하면서 가정도 돌보려니 영어 배우러 학교 다닐 시간이 없었어요. 출퇴근길 차에서 카세트 테이프를 틀어놓고 배워가며 콩글리시로 손님들을 맞았어요. 오래 하다 보니 소통은 다 되더라고요(웃음).”


―그땐 외국인 손님이 많지 않았나 봅니다.


“1980~1990년대만 해도 전체의 20% 정도? 2000년쯤부터 많아졌죠.”


―일 배우려고 들어간 식당에서 8년이나 일했습니다.


“주인이 못 나가게 붙잡았어요. 제가 손님 취향을 잘 기억해요. 지난번에 오셔서 뭘 드셨고,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기억했다가 맞춰서 내드리니 좋아하셨어요. 주인이 장 보러 갈 때 따라가고, 케이터링(출장 연회) 나갈 때도 따라다니면서 많이 배웠어요. 브레이크 타임만 되면 32번가(코리아타운)에 나가서 ‘언젠가는 여기서 내 가게를 하겠다’ 다짐했죠.”


우촌에서 8년 일하고 나온 박 사장은 샌드위치 등 간단한 음식을 판매하는 델리(deli)를 먼저 열어 4년 운영했다. 그러고는 9·11 테러가 터지고 2개월 뒤인 2001년 11월 식당 자리를 계약하고 2002년 정식으로 문 열었다.


―다들 ‘미쳤다’고 했다면서요.


“테러 직후 맨해튼에 왜 식당을 여냐고 다들 말렸지만 그래도 열고 싶더라고요. 다행히 (매출이) 불길 일어나듯 일어났죠.”


―얼마나 장사가 잘됐길래.


“줄을 하도 길게 서서 옆 가게 영업에 방해가 될 정도였어요. 손님이 가게 앞에서 미리 주문부터 하고 밀려 밀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가 자리 나면 먹고 나가는 식이죠. 공장 생산 라인 같았어요. 손님들이 오래 앉아 드시지도 못했어요. 테이블 옆에 서서 기다리는 손님이 앉아서 먹는 손님에게 ‘다 드셨으면 일어나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도 좀 먹게요’라며 밀어냈어요(웃음).”


더큰집은 매년 신정(1월 1일) 찾아오는 모든 손님에게 떡국을 공짜 서비스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뉴욕에서 직장 생활을 한 서재은(41)씨는 더큰집에서 평생 잊지 못할 떡국을 먹었다. “2006년 1월 첫날 친구들과 더큰집에 갔어요. 테이블에 앉아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데 떡국이 1인당 한 그릇씩 먼저 나오더라고요. ‘떡국은 주문 안 했다’고 하니, 종업원이 ‘설날 특별 서비스’라고 하더라고요. 혼자 살면서 끓여 먹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떡국을 오랜만에 먹으니 고향 집에 돌아온 것 같아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공짜 떡국을 주게 된 계기가 있나요.


“유학생들이 떡국 먹을 데가 없잖아요. 안됐더라고요. 식당 개업 첫해 친한 유학생들에게 ‘다들 모여, 1월 1일에 떡국 끓여 먹자’고 불러 모았어요. 그렇게 시작해 모든 손님에게 드리게 됐어요. 설날 하루 600여 그릇을 끓여요.”


―유학생들 덕분에 다른 나라에도 많이 알려졌다면서요.


“2000년대 초부터 유학생이 많이 왔어요. 우리 식당이 펜 스테이션(기차역)에서 가까우니까 멀리 보스턴에서부터 찾아와요. 유학생들이 낮에 뉴욕 와서 놀다가 밤새도록 해장국 하나 붙들고 앉아 있다가 새벽 기차 타고 돌아가고 그랬어요. 유학생 하나가 오면 외국 친구들을 데려와. 그 친구들이 자기 나라에 우리 식당을 소개해줘요. 이탈리아 신문에 ‘큰집 마마(엄마)’라고 나왔고, 독일 신문에도 실렸어요.”


몇몇 뉴요커만 알음알음 찾던 코리아타운 한식당은 2000년대 중반부터 뉴욕에 한식 붐이 일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더큰집을 찾는 외국인도 크게 늘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이민 1세대가 생계를 위해 운영하는 한식당은 차츰 사라지고 요리 학교에서 정식으로 배운 젊은 요리사들이 차린 한식당으로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박진배 뉴욕 FIT(패션기술대학) 교수는 “뉴욕의 오래된 한식당 중 제대로 운영하는 곳은 더큰집이 거의 유일하다”고 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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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손님이 얼마나 늘었나요.


“과거엔 20% 정도였지만 지금은 70~80% 돼요. 엄청 많아졌죠.”


―한식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죠.


“전에는 김치 못 먹는 분이 많았어요. 요즘은 김치부터 달라고 해요. 이제 뉴욕에선 김치 못 먹으면 촌스럽게 됐어요. 한국 손님들이 오히려 김치를 안 찾아요.”


―한국인 손님과 외국인 손님이 선호하는 메뉴가 다른가요.


“외국 분들은 무조건 바비큐. 갈비, 불고기 등 고기를 불판에 직접 구워 먹는 걸 좋아해요. 한국 분들은 주로 김치·된장찌개를 시켜요. 외국 나와서 느끼한 양식 드시니 칼칼하고 개운한 게 먹고 싶은가 봐요.”


―갈비부터 김치찌개, 고등어구이, 떡볶이까지 없는 메뉴가 없던데 여전히 새 메뉴를 찾아 한국에 오나요.


“항상 업그레이드해주지 않으면 뒤떨어져요. 인기 메뉴 중 하나인 떡볶이는 1990년대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배웠죠. 떡볶이 한 접시에 1000원 할 땐데, 너무 맛있어서 포장마차 주인한테 1만원 주면서 ‘이거 좀 가르쳐주세요’ 했더니 웃으며 가르쳐줬어요.”


―한식당뿐 아니라 이탈리아·프랑스·일식당 등 요즘 서울에서 ‘핫’하다는 데는 다 다니시더군요.


“한국의 외식·식당이 너무 발전했어요. 이제는 한식 외에도 봐야겠더라고요. 한국 스타일로 풀어낸 파스타, 피자 같은 걸 맛보며 아이디어를 얻어요.”


―남의 식당과 자신의 식당을 모두 합쳐 30년 가까이 했는데도 여전히 배울 게 있나 봅니다.


“음식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점에서 인생과 닮은 것 같아요.”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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