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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행복은 신기루, 작은 즐거움으로 슬픔 덮고 살아야" 85세 정신과의사 이근후

50년간 15만명 돌본 정신과의사가 밝힌 ‘행복의 과학’

"원한, 분노, 불안 없앨 수 없어… 작은 재미로 덮어둘 뿐"

"임종 체험은 오만한 것, 죽음은 연습 없이 받아들여야"

"노인이 청년에게 줄 것은 가르침 아닌 경청"

"3대가 같이 사는 독립집합가족… 현관 비밀번호도 비밀에 부쳐"

조선일보

정신과전문의로 50년간 진료하고 학생을 가르친 이화여대 명예교수 이근후. 30년 넘게 네팔에서 의료봉사를 했고 40년 넘게 광명 보육원의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사진=장련성 기자

이화여대 명예교수이자 50년간 정신과의사로 살아온 이근후 선생을 만나러 평창동 가족 아카데미아를 찾아갔다. 그가 쓴 ‘백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을 읽고 나서다. 김형석 교수의 ‘백 년을 살아보니'가 100세 시대 인생을 돌아보는 성실한 교과서라면, ‘백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은 눈 감는 순간까지 야금야금 반전의 재미를 추구하는 역동적인 100세 참고서다.


50년간 15만 명을 돌본 정신과의사는 말한다. "살아보니 인생은 필연보다 우연에 좌우되었고 세상은 생각보다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러운 곳이었다"고. 그래서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사소한 즐거움을 잃지 않는 한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책갈피 어디를 펼쳐도 ‘구체적 지혜’와 ‘노화의 생기’가 넘쳐흘렀다. 선생은 현재 시력을 거의 잃어 아내이자 내 대학 시절 은사인 이동원 선생(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정년 퇴임 후 생애 교육터인 가족 아카데미아를 공동운영하고 있다)에게 연락해 인터뷰를 잡았다.


더위가 잦아든 늦여름 아침. 세검정 언덕 큰 바위 앞에서 ‘죽을 때까지 재밌게 살고 싶다’고 선언한 노학자를 만났다. 형식적인 팔순 잔치가 싫어, 한해 내내 "오늘이 내 팔순이야." 헤어질때마다 지인들과 웃으며 기념했다던 그다.


백남준의 설치 작품 ‘다다익선'을 흉내낸듯 한쪽 벽엔 오래된 컴퓨터 모니터가 겹겹이 쌓여 있고, 소파 위엔 아내와 손잡고 찍은 사진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모자를 쓴 얼굴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제목은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인데, 앞에 작은 명조체로 ‘어차피 살 거라면’이라는 부제를 달았더군요. 두 어절의 분위기가 달라서 놀랐습니다.


"나는 제목을 ‘어차피 살 거라면'이라고 짓고 싶었어요. 우리 중 누가 이 세상에 나오고 싶어서 나왔습니까? 저 세상으로 떠나는 것도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지요. 그래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잖아요. 어차피 주어진 생명이니 나름대로 즐기다가 저세상으로 가자는 거죠.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에요."


-85년을 살아오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나이 든다는 게 즐거운 일은 아니예요. 그렇다고 마냥 슬프지도 않지요. 허허. 즐겁지 않은 게 나이 드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백 년을 살아보니'를 쓰신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와는 또 다른 지혜를 보았습니다. 철학자와 정신과의사는 삶을 통찰하고 기술하는 태도에 차이가 있더군요.


"구체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던가요?"


-철학자가 관조적이라면 정신과의사는 좀 더 생활적이랄까요.


"김형석 교수는 자기 성찰에서 인류의 성찰로 나아간 분입니다. 나는 타인의 상한 마음을 다루는 사람이지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좀 더 직접적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아무튼, 100세에 재혼하겠다고 농담하는 그 어른에 비하면 85세인 저는 어린이지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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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출간해 40만부가 팔린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와 최근에 낸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엔 그의 인생 비법이 농축돼 있다./사진=장련성 기자

-무엇보다 아내 되시는 이동원 선생과의 동행이 아름답습니다. 사회학자와 정신과의사가 만나 인간과 사회의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통합을 이루셨어요.


"남들은 통합이라고 하지만 나는 쑥스러워요."


-부부지간뿐인가요? 3대 13명의 가족이 한 채의 빌라에 모여 사는 가족 대통합은 놀랍습니다.


"모여 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할아버지, 아버지 등으로 이어지는 중심 세력이 그들의 가치관으로 다스리고 나머지는 무조건 순응하는 방식이죠. 유교가 바탕이 돼서요. 하지만 지금은 단일한 가치체계가 없어요. 가치의 아노미 과정에 있지요. 할아버지고 아들이고 손주고, 다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모여 살 수 있어요. 말 그대로 ‘다문화사회’로 가는 거죠."


책에는 이들 가족에 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나온다. 아들과 딸 내외가 모여 살지만, 그 합가의 정체는 모여 살며 어려움을 해결하는 집단 지성공동체에 가깝다. 집터는 그가 제공했지만, 자식들이 각자의 경제적 형편과 취향대로 집을 설계했고 현관 비밀번호조차 비밀에 부친다. 큰아들의 제안으로 함께 사는 17년 동안 위험을 나누어졌고 위기를 매끄럽게 넘겼다. 손주들은 "할아버지가 가장 잘한 일이 모여 살게 한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손주들과 잘 통하시는 모양입니다. 노인이 청년에게 줄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경청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선생 자신도 늘 부드럽게 맞장구를 쳐주셨던 외할머니와의 대화를 아름답게 기억하신다고요.


"맞습니다. 대개 노인이 되면 성장기에 학습한 교양과 습관이 세포 조각 떨어져 나가듯 휘발돼요. 오롯이 남는 건 부모에게 받은 DNA와 기질, 어린 시절의 가정 교육뿐이죠. 그래서 3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나온 겁니다. 그렇게 중간 교양이 사라져버리면 뭐가 남겠어요? 고리타분한 어린아이죠.


그 모습을 피하려면 노인은, 노인이 되기 전부터 젊은이에게 얘기 듣는 걸 즐겨야 합니다. 하지만 경청은 무한한 자제력이 필요해요. 그 노력을 놓치면 어디 가서 마이크 받으면 안 놓고 1시간을 횡설수설합니다. 시간은 짧게 느껴지지, 머릿속엔 이 얘기 저 얘기 떠오르지… 그 두서없는 얘기를 듣느라 젊은이들도 인내력 테스트를 받는 거예요."


-선생은 어떻게 경청을 실천하고 계신가요?


"대학에서 가르칠 땐 매년 1학년 신입생을 받잖아요. 그 덕에 젊은이들과 교류했던 게 몸에 배었어요. 청년들 말을 알아들으려고 나는 애들이 쓰는 신조어부터 공부했어요. 어느 날 작정하고 신조어를 다 뽑았더니 A4용지 5장이야. 그걸 벽에 붙여두고 모르는 말 나오면 사전 보듯 찾아봤어요. 어느 순간 말귀가 트여 인터넷 댓글도 잘 달아요(웃음)."


-노력이 대단하십니다.


"허허. 제가 풀꽃세상이라는 환경단체에서 주는 최우수 인터넷 댓글상도 받았어요. 그 단체가 지렁이나 자전거에 상을 주는 재미난 곳이죠. 그런데 이젠 눈이 나빠지니 그렇게 좋아하던 소통도 못 하겠더라고. 왼쪽 눈은 네팔 의료 봉사하러 다닐 때 실명했고, 오른쪽 눈도 황반변성으로 세상이 흐릿해요. 그럴 때 필요한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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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의 100세 시대 생애주기에 따르면 1세~17세가 미성년, 17~65세가 청년, 65~79세가 중년, 79~99세가 노년이다. 그는 퇴직 이후 중년기를 알차게 썼다. 사이버대학교에 들어가 최고령에 과수석 졸업했고, 아내와 가족 아카데미아를 열었다./사진=장련성 기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이요?


"네. 눈은 어둡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일을 찾자는 거죠. 손주한테 시급을 주고 내 말을 구술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시력은 잃었지만 그 일로 손주와 정기적인 대화의 물꼬를 텄어요. 이번 책도 그렇게 나왔어요. 가끔 내가 쓴 용어를 못 알아들을 땐 그 말을 너희 세대는 어떻게 표현하느냐고 묻고 대체해요. 결과물은 우리 두 세대가 고루 섞인 젊은 문장이죠. 주고받고 섞이는 즐거움에 눈을 떴어요. 시력이 나빠져서 배운 게 그뿐 아니에요."


-잘 안 보이니 뭐가 또 보이시던가요?


"지방 강연 갔을 때 일이에요. 강연 도와주신 교수님이 계단 내려갈 때 내 손을 잡아주셔서 제가 농담을 했어요. "잘 안 보이는 건 슬픈 일이지만, 그 덕에 김 교수 님 손을 만지게 돼 영광입니다." 그랬더니 "손을 만지다와 잡다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알려주더군요. ‘만지다’는 자칫 성추행의 혐의까지 둘 수 있다는 거죠. 그 설명을 못 들었으면 어쩔 뻔했나, 고마우면서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스스로 정신을 치료하는 사람인데, 언어에 그리 민감하지 못했던가, 반성도 했고요."


-인생의 슬픔은 일상의 작은 기쁨들로 회복된다는 사실도 큰 위로가 됐습니다.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해석의 힘이 필요하겠지요?


"그렇죠. 하지만 인생의 슬픔이 작은 기쁨으로 회복되진 않아요. 잠시 잊을 뿐이죠. 인생은 고통이고 슬픔이에요. 그 끝이 죽음이라 슬픈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언제 기쁘십니까?


"순간순간 작은 일에 기뻐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점수를 받을 때 기쁘고, 아이들 생산해서 키워낸 것도 기쁩니다. 친구와 좋은 인연을 쌓은 것도 기쁘죠. 네팔에 의료 봉사 다니는 것도, 광명 보육원에서 아이들 돌보는 것도 즐거워요. 즐거움을 목적으로 그 일을 하진 않았지만 해서 즐거우니 자꾸 하게 되더군요."


-행복과는 다른가요?


"행과 불행은 사람이 만들어낸 신기루지요. 있지도 않은 걸 억지로 만들어 냈어요. 의학적으로 행복과 가장 가까운 상태는 쾌락이에요. 소망했던 걸 이뤘을 때 느끼는 만족감이죠."


-그렇다면 불행은 무엇인가요?


"행복하지 않을 때죠. 경계는 명확하지 않아요. 간소하게 끼니만 때워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진수성찬 차려 먹어도 불행을 느끼는 사람이 있지요. 신기루와 같으니 가타부타 따질 것이 못 됩니다. 분명한 건 자기 성질대로 잘 살다 보면 만족하고, 만족이 지속되면 행복을 느낀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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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유머가 가득한 노학자의 얼굴./사진=장련성 기자

한 사람의 행과 불행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풍파를 고스란히 흡수한다. 이근후 교수의 인생은 격동의 현대사와 맞물려 파란만장했다. 의과대학(경북대) 레지던트 시절 뒤늦게 4.19 시위 주동자로 지목돼 10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출소하니 전과자 딱지가 붙어 유학길도 취직 길도 막혔더라고. 그는 자신의 인생은 계획대로 풀리지 않았다고 했다. 무엇을 제대로 해볼라치면 의지를 꺾는 장애물이 나타났다.


고민 끝에 당시 의사들이 기피하던 국립정신병원장에게 편지를 썼고 다행히 받아들여졌다. 그곳에서 풍부한 임상 경험을 쌓아 의사로서 크게 성장했다. 전화위복이었다. 인생이 순탄하게 흘러가나 했더니, 난데없이 군대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시절이 바뀌어 4.19 사면자가 되면서 입영 통지를 받은 것.


제대 후 다시 원점에 섰다. 부르는 곳이 없다고 낙망하지 않고 일일히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다. 예상치도 못하게 연세대 전임강사 제안을 받았고 이후 이화여대로 옮겨 평생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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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살 거라면 백살까지 유쾌하게 나이드는 법'에서 그는 65~79세가 가장 자유롭고 재미난 시기라고 했다.

그는 책에 이렇게 썼다.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애쓰면 마법처럼 막다른 곳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게 여든 다섯 해를 살아본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리다.’ 나는 그 말에 크게 위로받았다.


불운과 행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게 삶. 우리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끝난 것 같아도 끝이 아니다. 계획대로 되는 법도 없다. 그래서 불안하지만 그래서 희망한다.


85년 산 노학자의 통찰에 의하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버텨야 하는 운명’이고, ‘운명 앞에서 약자인 자신의 처지를 고뇌하며 꿋꿋하게 버텨내는 게 인간다운 삶’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옥과 군대를 들락거릴 땐, 인생이 왜 이리 안 풀릴까 답답했을 텐데요.


"가정을 꾸렸는데 부양을 못 하니 괴로웠지요. 애들이 넷이나 되니 셋방도 잘 안 줘서 이사도 밥 먹듯이 했고. 이동원 선생이 혼자 살림을 꾸렸는데, 그때 생각하면 머리가 휑해서 기억도 안 난대요(웃음). 아내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요.


사실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지만, 나는 처음부터 용기 있는 사내는 아니었어요. 자유당 정권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바꿔야겠다는 생각은 못 했어요. 의과대 공부만으로도 힘이 들었거든. 어쨌거나 학생회에서 4.19 지도자 자리를 맡았고, 어찌어찌 회의하고 선언문 만들면서 변해간 거죠. 그전까지 나는 반장을 해도 차렷 경례만 하고 여학생 보면 담벼락에 붙어 숨을 정도로 수줍음이 많았어요.


그런 내가 4.19를 변곡점으로 달라진 거예요. 그게 정신과적으로 보면 분노를 폭발시킨 거라. 분노를 터뜨려 영웅의 옷이 덧입혀지니, 그에 걸맞은 행동이 뒤따라간 거죠. 감옥에 갇히니 생각도 깊어졌어요. 다행스러운 건 내 전공이 정신과였다는 거예요. 정신과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환자로 약을 먹고 살았을 사람이야."


환자와 의사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나는 그 경계에 있다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환자를 치료했을 뿐. 환자를 치료하면서 나도 치료가 됐어요."


-국내 최초로 감옥 같던 정신과 폐쇄 병동을 개방 병동으로 바꾸고 사이코 드라마 치료도 처음 시작하셨어요. 환자를 향한 동병상련의 마음이 계기가 됐던 건가요?


"내가 교도소에 갇혀봐서 알지요(웃음). 개방 병동은 정신의학 교과서대로 한 거예요. 보통 환자가 혼자서 웃는 것, 중얼거리는 걸 의미 없다고 기술해요. 나는 환자의 모든 행동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신분석 이론에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어요. 실없어 보이는 웃음, 중얼거림을 치료자가 못 알아들었다고 ‘의미 없음'으로 단정해선 안 되죠.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적어야 해요. 내 마음을 대하듯, 마음의 고통을 앓는 사람들을 치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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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후 선생의 말에 따르면 인생은 기질과 환경 사이에서 매 순간 이루어진 선택의 합이다./사진=장련성 기자

-50년 넘게 15만 명을 진료하면서 깨달은 것이 삶의 고통은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에 집착해서라고요. 딱 제 얘기 같았습니다(웃음).


"그게 대표적인 환자의 증상이야(웃음). 49% 병리에 51% 정상이면, 다들 겉으로 보이는 51%로 정상인처럼 살아갑니다."


-억울한 생각, 불안한 생각이 차오를 땐 어찌합니까?


"그런 생각은 인위적으로 끊어낼 수 없어요. 잊으려고 애쓸수록 과거는, 미래는, 괴물처럼 커져요. 방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는 일을 찾는 거예요. 원한을, 걱정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즐거운 일을 찾아서 야금야금해야죠. 상한 마음이 올라올 틈이 없도록. 불안을 끊어낼 순 없지만 희석할 순 있거든요. 그렇게 작은 재미가 오래 지속하면 콘크리트 같은 재미가 돼요."


불안을 덮으려고 눈앞의 조작적 즐거움에 집착하면 이후 감당 못할 고통만 커질 뿐이라고 했다. "섹스, 마약, 알코올 중독처럼 눈앞에 큰 쾌락을 추구하면 뼈아픈 대가를 치릅니다."


-재능에 대해 불안해하는 극작가 이강백 선생에게는 "자기를 너무 높이도 낮게도 보지 말라"고 충고하셨죠. 살면서 가장 필요한 기술이 ‘자신을 바로 볼 줄 아는 능력’이라고 한 건, 그만큼 자기객관화가 어렵다는 증거가 아닐는지요?


"자기객관화만큼 어려운 게 없어요. 자기를 제대로 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높게 보거나 낮게 보거나. 대부분 자기 왜곡이죠. 그래도 포기하면 안 돼요. 끝없이 노력하면 바로 보는 것에 근접할 수는 있어요."


-‘85살 이근후’. 선생을 객관적으로 보면 어떤 모습입니까?


"허허. 일단 오래 살았어요. 내 아버지는 49살에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49살을 지나갈 때, 나는 아버지처럼 죽을까 두려웠어요. 정년퇴직 후에야 ‘얼마나 살까’를 잠시 잊었지요. 그래도 칠십을 넘고 팔십을 넘을 줄은 몰랐어요(웃음). 지금의 나는… 저세상에 더 접근해 있어요. 불안에 떨지는 않지만, 불안을 안고 사는 85세지요. 그런 줄도 모르고 후배 교수는 나를 바위 같다고 하더구먼(웃음)."


스스로 85세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자신이 놀랍다며 웃었다. 쓸쓸하고도 충만한 미소였다. 불안조차 정직하게 수용한 채였다. 고혈압에 당뇨에 지니고 있는 병이 한둘이 아닌 데도, ‘85년 된 고물차’를 끌고 부산으로 미국으로 캐나다로 강연을 다녔다고 했다. 내게도 그는 바위처럼 보였다. 바람에 흔들려도 늘 그 자리에 있는 바위. 우리에게 어른이란 그런 존재가 아닌가.


-어른이 되어서도 대접받으려 드는 수동성이야말로 사회와 불화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도 지적하셨지요. 먼저 다가가고 작은 거라도 나눠야 외롭지 않다고요.


"얼마 전 시니어타운에 들어간 친구를 찾아갔어요. 응접실에서 고운 할머니 한 분을 뵀습니다. 혼자서 책을 읽는데 책장을 안 넘기고 웃기만 해요. 일명 조용한 치매지요. 한쪽에서는 몇몇 할머니들이 함께 모여 배꼽이 빠져라 웃어요. 자, 두 그룹 중 누가 행복하겠어요?


모여서 수다를 떨어야 건강해요. 친구에게 들으니 시니어타운 남자들은 대부분 혼자 밥 먹고 자기 방에 들어간대요. 서로 눈인사도 안 하는데, 우스갯소리로 그걸 ‘강남 자존심'이라고 한대요. 다들 사회에서 한가닥 했으니 대접받으려는 자세를 못 버린 거죠. 명함 내려놓고 즐겨야 남는 거예요. 과거에 높았건 낮았건, 한집에 들어왔으니 재밌게 어울려야죠. 수다 떨면 죽을 여가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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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몇이든 사는 동안 전취적인 사고를 지속해야 합니다.”/사진=장련성 기자

-자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말년의 큰 복입니다. 비결이 있는지요?


"자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좀 무심한 게 좋습니다. 부모가 아이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이지요. 가끔 강연에서 만난 어머니들에게 질문을 해요. "자녀를 잘 키우고 싶으냐? 아니면 자녀들이 잘 컸으면 좋겠냐?"


잘 키우고 싶은 건 엄마죠. 잘 컸으면 싶은 건 주체가 아이예요. 취학 전엔 아이를 주체로 키우던 부모도 학교 보내면 자신의 가치관을 주입하더군요. 사회 전체가 스스로 잘 크는 아이를 용납 못 하니 안타까워요. 부모는 아이가 잘 크도록 도울 뿐입니다. 다만 아이의 기질과 탤런트에 맞추기 위해 예의주시해야죠. 관찰을 잘하면 기어 다닐 때도 특성이 보여요. 나머지는 아이의 자생력을 믿으세요."


-선생은 아이가 스스로 잘 크도록 놓아 키우셨습니까?


"아내나 나나 둘 다 일하러 가야 했으니 놓아주지 않을 수 없었어요(웃음). 그런데 이론상으로도 그게 맞으니 이제사 합리화를 하는 거죠. 허허."


-큰아드님이 천문학자인 이명현 선생이시죠?


"맞아요. 이젠 나보다 아들이 더 유명해. 학문의 스케일도 크지요. 나는 미시적인 사람의 마음을 다루지만, 내 아들은 가시적으로 광대한 우주를 설명하니까요. 아들과 우주와 별에 관해 이야기할 땐 그 무한함에 할 말을 잃어요."


그 아들이 얼마 전 자기 대에 이르면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결정했고, 그는 "굶는 영혼이 되겠구먼" 웃으며 반겼다고 했다. 제사는 산 자들에게 즐겁고 의미 있는 자리고, 그 결정은 오직 자식들의 몫이라고.


-죽음에 대해 여쭙지요. 오래 살아도 마지막에 두려워 울면서 죽음을 맞이한 부모가 자식에게 트라우마가 된다는 걸 저는 최근에 알았습니다.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만큼 사랑하는 이에게 큰 선물은 없다고 하셨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죽음은 두렵지요. 그게 정상이에요. 정신분석에서 보면 죽음을 대면하기 무서워 자살하기도 합니다.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서요. 최근엔 관에 들어가는 체험도 하더군요. 눈 뜨고 관에 들었다가 나오는... 하지만 그조차 오만입니다. 헛소리죠. 아무런 준비 없이 오는 게 죽음이에요. 죽음은 올 때 경건하게 받아들이면 돼요. 연습으로는 알 수 없는 게 죽음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가는 날까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고 웃음이 나는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드는 것뿐이라고 했다. "추억조차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에요. 기분 좋게 지내는 하루하루, 생활이 추억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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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부침이 있고 부침을 잘 견디면 편안한 시기가 다시 찾아옵니다. 그래서 버티는 힘이 필요하지요.”/사진=장련성 기자

-혹 삶에서 특별히 소중한 우연과 인연이 있으신가요?


"모든 인연과 우연이 다 고마워요. 진심입니다. 젊을 땐 서운한 것도 많았지만, 나이 들수록 성경에 있는 ‘범사에 감사하라'가 가장 좋은 말이라는 걸 알겠어요. 억울했던 일들도 조용히 생각해보면 다 감사의 창문이 열리는 소리였어요."


-매일 아침 눈뜨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아! 눈떴으니 행복하다. 이왕 눈떴으니 재밌게 살아야지. 오늘도 눈떠서 인터뷰할 생각을 하니 좋아요. 김 선생이 가고 나면 또 그 좋은 여운이 며칠을 가요. 기사가 나오면 그걸 보고 나누며 또 며칠이 즐겁겠지. 그렇게 하루하루 불안을 달래가요. 소소한 즐거움의 끈을 되도록 길게 만드는 거지. 허허."


-오늘 하루를, 선생은 또 어떻게 보내실 생각입니까?


"오후엔 네팔에서 온 친구와 차를 마실 거예요. 그다음엔 집에 가서 흔들의자에 앉아 TV를 켜겠지요. 눈이 안 보이니 소리로만 뉴스를 들어요. 시사 프로의 패널들이 과장해서 떠드는 얘기를 듣고 있으면, 꼭 젊은 날 정신과에서 환자 보는 것 같아 재밌어요. 허허허. 그렇게 또 하루가 가는 거죠."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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