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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오메가·론진·RSW… 北 ‘최고 존엄’ 시계가 왜 중고로?

[아무튼, 주말]

김일성·김정일 이름 새긴 시계

돈앞에 장사 없나, 암암리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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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에 매물로 나온 '명함 시계'. 김일성 이름이 새겨진 스위스 론진 시계다. '星期'(요일)가 한문으로 표기돼 있다. /이베이

“희귀 김일성 손목시계 팝니다.”


최근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 독특한 매물 하나가 올라왔다. 북한 독재자 김일성의 이름이 자칭 ‘태양서체’로 붉게 새겨진 ‘명함 시계’(또는 존함 시계)다. 스위스 브랜드 론진(Longines) 제품으로, 판매가는 3100달러(약 394만원). 판매자는 상품 설명에 “독재자들은 충성심 강화를 위해 충신들에게 사치품을 선물하곤 했다”고 영어로 적어놨다. 발송지는 대한민국이다.


지난 12일 온라인 카페 중고나라에도 ‘명함 시계’가 매물로 나왔다. 붉은 글씨로 김일성의 이름이 원판에 인쇄된 은색시계, 스위스 명품 오메가(OMEGA) 제품이다. 판매가 385만원. 10여 년 전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회원을 통해 입수했다고 한다. 해당 판매자는 “너무 연락이 많이 와서 머리가 아플 정도”라고 말했다.

◇절대자의 하사품, 어쩌다 매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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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브랜드 RSW 제품에 김정일의 이름을 새겨놓은 '명함 시계'. /이베이

‘명함 시계’는 북한 국기훈장(國旗勳章) 1급에 해당하는 특권층의 상징이다. 기록 명부가 있어 추적도 가능하다. 1980년대 한 간부가 이를 도둑맞자 당국이 즉각 수사에 돌입했고, 겁먹은 범인들이 슬그머니 당위원회 문 앞에 시계를 두고 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 한 탈북자는 “‘명함 시계’를 받으면 은퇴 후에도 현직에서 받던 식량과 봉급이 유지된다”며 “도둑들도 이걸 건드리면 정치범이 되니까 훔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중고 시장에 나온 것일까?


모스크바 북한대사관에서 일했고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보조 작가로도 참여한 탈북 작가 곽문완(55)씨는 “김일성 사후 시간이 오래 지났고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수혜 당사자가 아닌 가족·친지 등이 내다 팔아 유출된 것 같다”고 말했다. 약화된 선대의 영향력과 극심한 경제난이 그 이유라는 분석. 탈북 전 북한에서 ‘명함 시계’를 수리한 경험이 있는 수리 전문가 김학민(37)씨는 “가보로 여겨지는 물건이어도 하도 궁핍하니 암시장에 나오는 것”이라며 “아무리 오메가여도 너무 옛날 제품이어서 비교적 신상품인 일본 세이코 ‘명함 시계’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첩보기관도 발끈한 중고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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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품 인증서와 함께 2017년 온라인에 중고 매물로 올라온 오메가 '명함 시계'. /이베이

‘명함 시계’는 심심찮게 거래되고 있다. 2017년에도 이베이에 ‘김일성 시계’가 매물로 나왔다. 발송지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판매자는 진품 인증서와 함께 “이 시계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것”이라며 “양국 지도자인 김일성과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 북한과 유고슬라비아는 가까운 외교적 관계를 누렸다”고 설명했다. 김일성이 티토에게 선물했다는 이 시계는 5495달러(약 708만원)에 판매됐다. 그러자 북한 국가보위성은 공작원을 헝가리로 파견해 진상 파악에 나섰다. ‘명함 시계’가 자본주의적으로 공식 거래된 초유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확인한 바 티토의 손자가 내다 판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독재자 가족이 이웃 독재자의 선물을 팔아버린 이 웃지 못할 사연은 지난해 7월 사단법인 북한연구소 발간 월간지 ‘북한’에 소개됐다.


현재 이베이에는 2대 독재자 김정일의 ‘명함 시계’도 매물로 나와있다. 발송지는 호주이고, 판매가는 1만 호주달러(약 870만원)다. 오메가나 롤렉스보다 인지도가 떨어지는 스위스 시계 RSW 제품이지만, 김일성의 이름값보다 2.5배 비싸다. 판매자는 “이 시계는 김정일 생일을 맞아 조선노동당원들에게 배포됐다”며 “내가 북한에서 구할 수 있었던 두 개 중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소장품으로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시계 통치, 체제 모순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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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대외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가 공개한 인민배우 박영순이 받은 김정일 친필 오메가 시계.

김일성은 체제 유지와 충성 경쟁을 위해 이른바 ‘선물 정치’를 했다. 외국산 시계는 그 대표적 품목이다. 값비싼 데다 항상 손목에 차고 다니는 ‘표식’으로 기능하기 때문. 1972년 김일성 환갑 생일을 맞아 시계 마니아인 아들 김정일의 제안으로 스위스에서 주문해 처음 제작했다고 한다. 고위 간부는 롤렉스나 오메가 금시계, 하위 당료나 주민은 일반 오메가·세이코 시계로 차등을 두는 식이다. 대기근으로 아사자가 속출했던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관행은 이어졌다. 스위스시계산업연합에 따르면 북한이 1995년부터 10년간 수입한 스위스 명품 시계는 2400만달러(약 248억원)어치였다.


가난한 공산주의를 보전하려 자본주의 국가에서 생산된 사치품을 수여하는 방식, ‘명함 시계’는 그 자체로 북한 체제의 모순을 상징한다. 3대 독재자 김정은 역시 이를 통치에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 등으로 경제는 악화일로. 통일부는 “북한 일부 지역에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라고 밝혔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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