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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계곡처럼 투명하지만 밀도는 빡빡하다, 맑은 돼지국밥

[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맑은 돼지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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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동구 ‘온고식당’의 돼지곰탕.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여자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 손을 하나씩 붙잡고 있었다. 이 가족은 멈칫하는 기색 없이 곧바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이 막 시작됐다. 길어진 날 덕분에 아직 주변은 어둡지 않았다. 부모의 퇴근길에 만났을까? 아니면 오늘은 외식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을까? 식당은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온고식당’이었다. 가게 앞에 붙은 작은 메뉴판에는 ‘돼지곰탕’ ‘돼지불고기’ 같은 흔한 이름이 보였다. 빌라, 연립주택, 회사 건물이 비슷한 키로 들어찬 강동구청 근처 이면도로였다. 적당히 도시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 틈 사이로 이자카야, 분식집, 중국집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온고식당은 그 틈에서도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 간판은 아담했고 홀도 4인용 테이블 3개에 벽에 붙은 길쭉한 1인용 테이블이 전부였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주방이 훤하게 보였다. 가족 중 아버지는 바깥에, 딸과 어머니는 안쪽에 벽을 기대고 앉았다. 곧 식당에 빈자리가 없어졌고 주방은 바빠졌다.


이런 동네 식당에 온 게 얼마만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점심 회사 근처 식당에 가면 물기가 덜 마른 테이블 위에 휴지를 깔고 숟가락을 놓았다. 눈을 마주치는 일이 없는 종업원이 곧 아무 말 없이 음식을 가져다줬다. 무표정한 사람들 틈에 앉아 연료를 집어넣듯 밥을 먹노라면 빨리 바깥공기를 맡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집에 오니 조금은 느긋해지고 자세가 편해졌다. 동그랗고 깔끔하게 마감된 테이블 모서리, 갈색톤으로 장식한 실내, 도톰한 종이에 깔끔하게 인쇄된 메뉴판, 한숨 돌리고 나니 이런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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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곰탕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먼저 나온 ‘들기름메밀전’을 보니 그 작은 정성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커다란 배춧잎을 곱게 펴서 쪽파와 함께 밀가루 반죽을 얇게 입힌 후 기름을 넉넉히 둘러 부쳐낸 배추전은 고소한 향기까지 신선하게 느껴졌다. 눅눅하거나 오래된 이취가 없었다. 낮은 온도에서 부쳐 기름에 절여진 느낌도 아니었다. 대신 살짝 갈색빛이 돌 만큼 정확히 구워내 맛에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배춧잎은 씹을 때마다 연한 단맛이 돌았고 쪽파는 봄 내음처럼 상큼한 맛을 냈다. 비계가 적당히 붙은 냉제육은 이 집에서 직접 만든 쌈장과 함께 나왔다. 돼지고기를 3~4일 건조 숙성한 후 쓴다고 했다. 그 탓인지 돼지고기는 푸석거리며 풀어지기보다 탄탄하고 꽉 찬 식감을 지녔다. 식힌 고기는 오래 두면 기분 나쁜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이 집 음식에는 그것이 없었다. 돼지고기를 삶은 방법도 방법이지만 음식을 오래 두지 않고 그때그때 부지런히 만든다는 증거였다. 간장 양념에 채소를 넣은 돼지불고기 역시 그때그때 볶아내 물기가 적었고 고기 역시 부드러웠다.


옆 테이블에도 돼지불고기 접시가 함께 놓였다. 부부는 한목소리로 말했다. “양이 너무 많은데요?” 주방 너머에서 지켜보던 주인장이 답했다. “세 분이시라 조금 많이 했어요.” 슬쩍 봐도 1인분이라고 하기엔 접시에 담긴 모양새가 풍성했다. 함께 나온 상추에 고기를 얹어 입에 넣었다. 역시 돼지곰탕도 옆 테이블과 함께 나왔다. 뿌연 부산 쪽 국밥과 달리 이 집 곰탕은 산중 계곡처럼 투명하여 그릇 바닥이 그대로 보였다. 맛도 그와 같아 골짜기를 메울 듯 소복이 쌓인 하얀 눈을 녹여 끓이면 이런 맛이 날 듯싶었다. 그러나 맛은 헐겁지 않고 밀도가 빡빡해 두세 숟가락 먹다가 그릇째 들게 됐다. 부모 옆에 앉은 여자아이는 작은 손을 바쁘게 놀려 숟가락질을 했다. 아이의 야문 모습을 바라보며 부모는 곰탕에 밥을 말고 상추 쌈을 쌌다. 어른 손바닥을 접어놓은 듯 큼지막한 만두를 먹으니 밀물처럼 포만감이 밀려왔다. 만두 역시 주인장 성격을 닮아 소가 꽉꽉 들어찼고 소금간도 정확했다.


식사를 마칠 때쯤 주인장이 손을 모으며 물었다. “혹시 음식은 괜찮으셨나요?” 나는 그저 “좋았다”고 답했지만 잊히지 않는 것은 맛뿐만이 아니었다. 아마 그 아이는 오랫동안 이 집을 기억할 것이다. 옹이 하나 없는 나무 테이블, 맑고 따뜻한 국물과 그만큼 온기를 지닌 주인장의 마음. 시간이 지나면 그 아이가 거친 시간을 견뎌 어른이 될 것이다. 지친 하루와 위로받을 수 없는 어른의 막막함이 수시로 찾아올 것이다. 그때 마음 한구석에 사라지지 않는 그리하여 또 다시 견딜 수 있게 만드는 따스함이 있다면 이 집의 몫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온고식당: 돼지곰탕 9000원, 돼지불고기 1만원, 접시만두 8000원, 들기름메밀전 7000원,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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